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는다
신은 얼마나 많은 도형들을 이어 붙여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는지!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무(無)에서 무(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 지금 여기 / 심보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심보선의 시를 읽었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시인의 눈빛이 깊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울림이 짙은 시를 쓰는 줄은 새롭게 발견했다. 읽고 나서 멍해지는 시가 좋은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자에게 충격을 주고, 질문을 던지고, 불편하게 하는 시가 좋은 시다. 심보선의 시를 읽으며 그런 경험을 한다.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시집에 약력이 이렇게 적혀 있다.
'1970-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에서 심광길, 이정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망원동은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물난리를 겪었다. 좋은 기억은 야구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역전 홈런의 기억 같은 것. 나머진 다 안 좋은 기억들. 이를테면 교회에 처음 간 날 예배 도중에 구타를 당했다. 고등학교는 비리투성이의 학교였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내내 모범생이었다. 시를 쓰며 버텼고 비밀을 키워갔다.
1988-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다들 데모에 세미나에 분주할 때 혼자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시를 썼다. 빈 강의실에 한 명만 들어와도 못 견디고 나가 다른 빈 강의실을 찾아 들어가 시를 썼다. 2학년 들어 대학신문사에 사진기자로 들어갔다. 시위 현장을 누비고 망원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군대 가기 위해 신문사를 그만둘 때 사직서를 시로 썼다. 제출하진 못했다.
1990 - 입대했다. 시 쓰는 고참을 만나 칭찬을 받고 등단하기로 맘을 먹었다. 용기백배하여 어느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낙선했다.
1993 - 제대 후 복학은 안하고 영화 운동판에 기웃거렸다. 조직에 들어가 한 1년 영화 평론을 배우고 썼다. 조직에서 안 좋게 나왔다. 그때부터 다시 시를 썼다.
1994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당선을 알리는 기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비디오 가게에서 빌린 지 몇 달 된 비디오테잎을 반납하라는 독촉 전화인 줄 알고 바로 끊을 뻔 했다.
1994 - '21세기 전망' 동인 활동을 시작했다. 유하, 함성호, 박용하, 함민복, 김중식 등의 선배를 보며 열패감에 젖었다. 나는 그들처럼 멋진 시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시에 일생을 건 듯 했고 시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웠다. 나는 언제나 침묵했다. 그저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1998 - 유학을 떠나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시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지곤 했다. 8년 동안 발표 기회도 거의 없었다. 쓰고 싶을 때 시를 썼다. 우울할 때 자기 치유를 위해 시를 썼다. 스스로를 실패한 시인이라고 여겼다. 일생에 딱 한 권의 시집을 내자고, 그럼 된 거라고 내심 맘먹었다.
2006 - 귀국하여 미술관에 취직했다. 어느 날 성기완 선배가 미술관에 들렀는데 아직 시 쓰냐고 물었다. 안 쓴다고 했다. 성 선배는 청탁하겠다고 했다. 나는 안 그래도 된다고 했다. 말은 그리 했어도 심장이 뛰었다. 청탁이 왔고 '문학판' 잡지에 시 세 편을 발표했다. 그 이후로 계속 시를 쓰고 기회가 닿는 대로 발표했다.
2008 -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출간했다. 기쁘고 뿌듯했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14년 만에 첫 시집인데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지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기쁨이 더 컸다.
2009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작가선언 69'에 참여했다. 그 이후로 힘이 닿는 대로 이런 저런 농성, 시위 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낭송을 하고 강연을 하고 선언을 하고 글을 쓰면서 '함께 함' 속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확장시켰다.
2011 -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을 출간했다. 세계이자 연인인 '문디'에게 이 시집을 바쳤다.
시 쓰기 외에도 예술사회학과 예술경영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각종 용역 프로젝트, 그 외의 예술적, 문학적 실험 등을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 수행해왔다. 사회학, 문학, 예술에 발을 두루 걸치고 있으니 몸이 열이라도 모자란 바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숱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일을 도모하고 있다. 때론 지치고 피곤하나 나에겐 문디가 있다. 나를 고독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존재인 문디가 있다. 세계 속의 사랑, 사랑 속의 세계인 문디와 함께 걷는 길에선 언제나 말과 몸짓이 들끓는다. 이 들끓는 삶 속에서 나는 매번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다. 소멸과 생성의 틈새에서 시가 솟아오른다.'
시인의 다른 시를 한 편 더 소개한다.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서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 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 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 '나'라는 말 /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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