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자전거 / 고은

샌. 2011. 9. 2. 12:26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에서

초례 마치고

한강가에서

하룻밤 자고

안성 대림동산으로 왔다

 

상화 남편은 얼간이

성화는 철부지

축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백만원 얼마

상화

상화 남편

둘이 지닌 것 털어

집을 샀으니

화곡동 집 팔리지 않고

억지로 집을 샀으니

이백만원 얼마 이것으로 살아야 했다

마음속 화수분이라

무어나 차고

무어나 넘쳤다

마음 밖 가난이라

전화도 없다

전화 걸려면

십분쯤 가서

고개 너머 관리사무소 전화를 빌려야 한다

민음사에서도

문익환도

전보로 급래급래를 알려왔다

이백만원 얼마는 곧 동났다

안성장에 가

빗자루 사고

삽도 호미도 샀다

개수대 그릇도 샀다

빈털터리인데

창비에서 원고료가 왔다

살았다

살았다

무턱대고 자전거 한 틀을 샀다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를 잡혔다

삼단 자전거 바큇살이 찬란했다

오르막 허위허위 올랐다

내리막 어질어질 내려갔다

다음날부터 상화가 학교버스 내리면

입구에 나가 있다가

얼른 자전거에 태운다

집이 가까워오는 동안

상화는 맨드라미인 듯

옥잠화인 듯

과꽃인 듯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동료 교수 하나가 결강한 이야기

강의실 학생들의 눈빛 이야기

율리씨즈 이야기

부총장 면담 이야기를 한다

상화 남편은

장미골 모서리를 돌 때

오늘 쓴 시 이야기를 한다

상화는 누이인 듯 누나인 듯

상화 남편의 서투른 이야기를 듣는다

자전거 바큇살에 끼인 풀이 떨어져나갔다

해가 구름 속에서 나온다

이 사랑이 나중까지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 아닌 것

상화는 안다

상화 남편은 안다

집에 오니 무슨 전보가 또 와 있다

 

     - 자전거 / 고은

 

1983년에 고은 시인은 서울 수유리 안병무 선생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시인의 나이 쉰, 옥중 단식으로 몸이 피폐해져 있을때였다. 그리고 아내 상화의 직장이 있는 안성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는 가난했지만 깨소금 같이 행복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음속 화수분이라, 무엇이나 차고 넘쳤던 시절이라 했다.

 

둘째의 결혼이 내일로 다가왔다. 부모의 곁을 떠나 가정을 꾸미고 이제 성인이 된다. 부모가 바라는건 자식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밖에 없다. 오순도순, 아기자기하게 고운 사랑 키우며 잘 살거라. 짐을 싸는 너의 방에서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을 보았는데 그 책에 나오는 내용을 나도 그대로 전하고 싶다. 사랑을 가꾸되 그 사랑에만 너무 의지하지 말거라. 몸과 마음을 함께 하되 너희들 사이에서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라. 둘만의 사랑을 넘어 더 넓은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혼은 더 높은 세계로 오르는 새로운 출발점이란다. 다시 한 번 우리 예쁜 딸의 결혼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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