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병산습지 / 공광규

샌. 2011. 8. 18. 10:05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에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 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 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제비꼬리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실망했는지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갯버들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깔아놓겠지요

그러면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매화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발자국 매화꽃잎에 위에 똥을 싸 놓고서는

그걸 매화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 병산습지 / 공광규

 

검암습지, 마애습지, 풍산습지, 구담습지, 지보습지, 해평습지, 달성습지, 적포습지, 박진교습지, 딴섬습지, 도요습지, 물금습지, 대저습지, 삼락습지, 일웅도습지... 낙동강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습지들이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을 하면서 강바닥을 준설하고 직강화 공사를 하면서 만신창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 제목으로 된 병산습지도 준설 계획에 들어있다고 한다. 습지는 넓은 모래톱과 생물들이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다. 습지가 없어진다는 것은 강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의 먹이사슬이 파괴되는 것과 같다. 수생생물 몇 종이 사라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강은 그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강은 수백만 년을 흐르면서 온갖 생명들을 품어 안은 어머니의 품이었다. 강에 삽질을 하는 것은 갓난아이를 강제로 어머니의 품에서 떼어내는 것만큼 잔인한 짓이다. 그냥 그대로 두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두라. 강은 구불구불 흘러야 한다. 홍수가 나면 범람도 해야 한다. 강을 어항처럼 가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이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전으로 고작 몇 년 만에 산하를 절단 냈다.

 

이 시는 시인이 지난해 여름에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강변길을 걸어가면서 아픈 마음으로 썼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不憂國非詩也]’라고 했다. 당장의 눈앞 이익에만 매달려 있는 소인배들이 다스리는 나라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험한 시대를 살면서 짓는 죄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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