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느 노생물학자의 주례사 / 이가림

샌. 2011. 9. 16. 08:26

오늘 새로이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신랑과 신부에게

내가 평생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기생충을 들여다본 학자로서

짧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미잘이 소라게에게 기생하듯이

그렇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개미와 진딧물, 콩과 뿌리혹박테리아

그런 사이만큼만 사랑을 해도

아주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해삼과 숨이고기처럼

한쪽만 도움 받고 이익을 보는

편리공생(片利共生)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는

아름다운 기생충이 되세요

이상

 

     - 어느 老생물학자의 주례사 / 이가림

 

사랑은 노력과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쉼 없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성에게 끌리는 호기심이나 열정은 사랑이기보다는 연애 감정에 가깝다. 사랑은 연애처럼 달콤하지 않다. 결혼은 연애의 끝이고 사랑의 시작이다. 지난한 노력과 인내와 훈련을 통해 사랑은 성숙되어 간다.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하나의 독립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프롬은 이렇게도 말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법륜 스님은 <스님의 주례사>에서 결혼을 통해 뭔가 덕 볼 생각을 말라고 주문했다. 베풀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했다. 자신보다 짝의 입장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서로가 그렇게 한다면 그게 바로 생물학자가 말하는 상리공생(相利共生)일 것이다. 결혼하고 사랑하는 건 단순히 생물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지혜로워지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괴로움을 이겨나갈 힘을 얻는 것이다. 상처 받고 깨지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어주는’ 관계를 실천할 곳으로 가정만한 게 없다. 그러므로 가정은 또 다른 의미의 수도원이다. 새로이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신랑 신부들이 그런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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