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둥근 발작 / 조말선

샌. 2011. 9. 25. 15:34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 둥근 발작 / 조말선

 

과수원의 기형적인 사과나무에서 시인은 자유로운 인간성에 대한 억압을 읽는다. 그런 나무에서 열리는 사과는 둥근 발작이다. 사과의 빨간색은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분노다. 과수원 주인은 아마 최고의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거름을 주고, 농약을 치고, 봉지로 싸며 공을 들일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제자를 위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것은 둥근 발작을 유도하는 몹쓸 짓이 아닌가. 또한 비인간적인 세상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모든 체제와 행위는 범죄다. ‘말뚝을 박고 철사 줄로 동여매고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굴종을 강요하는 권위에 대한 시인의 조롱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