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구들목 / 박남규

샌. 2021. 2. 28. 11:05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

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

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

방바닥만큼 넓었다

 

차가워지는 겨울이면

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

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

 

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

온기를 안고 숨어있었다

오포 소리가 날 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 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 주루르 눈물을 흘렸다

 

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

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

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

사랑을 키웠다

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

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

 

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 콩나물은

자랐고 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 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

 

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였다

구들목 중심에는 책임이 있었고

때론 배려가 따뜻하게 데워졌고

사랑으로 익었다

 

동짓달 긴 밤, 고구마 삶아

쭉쭉 찢은 김치로 둘둘 말아먹으며

정을 배웠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을 맞고 싶다

 

검은 광목이불 밑에 

부챗살처럼 다리 펴고

방문 창호지에 난 유리 구멍에

얼핏 얼핏 날리는 눈을 보며

소복이 사랑을 쌓고 싶다

 

- 구들목 / 박남규

 

 

겨울에 고향에 내려가면 장작으로 군불을 때는 구들목이 제일 좋다. 자식이 내려왔다고 어머니는 평소보다 장작 몇 개를 더 얹으신다. 뒤꼍에는 힘 좋을 때 어머니가 해 놓으신 나무가래가 아직 덩치를 자랑한다. "내 죽을 때까지 다 땔지 모르겠다"며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신다. 동생이 집을 짓고 나서 방은 단열이 잘 되기 때문에 새벽까지 뜨끈뜨끈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온 몸이 나긋나긋해진다. 찜질방이 따로 없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어머니의 건강은 이 구들목에서 나오는 게 틀림없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어릴 때 추억은 이 시만큼 아름답지만은 않다. 다섯 형제는 이불 다툼을 하느라고 티격태격 했다. 새벽이 되면 방은 싸늘하게 식어서 서로 구들목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넉넉하게 덮을 수 있는 이불도 서로 잡아당기느라 자꾸만 작아졌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임금의 침실이 부럽지 않을 만큼 호사스럽다. 그런데 이건 뭘까? 물질적인 사치를 누리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이 허전한 느낌은? 추워도 따스했던 잃어버린 그 시절을 과연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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