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꼬막 / 박노해

샌. 2021. 2. 4. 08:30

벌교 중학교 동창생 광석이가

꼬막 한 말을 부쳐왔다

 

꼬막을 삶는 일은 엄숙한 일

이 섬세한 남도南道의 살림 성사聖事는

타지 처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모처럼 팔을 걷고 옛 기억을 살리며

싸목싸목 참꼬막을 삶는다

 

둥근 상에 수북이 삶은 꼬막을 두고

어여 모여 꼬막을 까먹는다

 

이 또롱또롱하고 짭조름하고 졸깃거리는 맛

나가 한겨울에 이걸 못 묵으면 몸살한다

 

친구야 고맙다

나는 겨울이면 니가 젤 좋아부러

감사 전화를 했더니

찬바람 부는 갯벌 바닷가에서

광석이 목소리가 긴 뻘 그림자다

 

우리 벌교 꼬막도 예전 같지 않다야

수확량이 솔찬히 줄어부렀어야

아니 아니 갯벌이 오염돼서만이 아니고

긍께 그 머시냐 태풍 때문이 아니것냐

요 몇 년 동안 우리 여자만에 말이시

태풍이 안 오셨다는 거 아니여

 

큰 태풍이 읎어서 바다와 갯벌이

한번 시원히 뒤집히지 않응께 말이여

꼬막들이 영 시원찮다야

 

근디 자넨 좀 어쩌께 지냉가

자네가 감옥 안 가고 몸 성한께 좋긴 하네만

이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

 

- 꼬막 / 박노해

 

 

거친 삶의 현장에서 나온 목소리는 힘이 있다. 나 같은 백면서생과는 체급이 다르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경험으로 터득한 것은 지혜가 되지만, 머리만 굴려 알게 된 것은 지식나부랑이에 불과하다. 

 

"이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거 사설 한번 시원하다.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 한때 혁명가 소리를 듣던 시인도 이 말에는 속이 뜨끔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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