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눈뜬장님 / 오탁번

샌. 2021. 3. 9. 10:25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장님이 되어 같이 늙어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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