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입동 / 이면우

샌. 2020. 11. 8. 11:04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간을 맛봄도 늙어서의 재미가 아닌가 싶다.

 

지난 세대의 가족 풍경이 이랬다. 큰아이가 들어서고 식구가 둥그런 상에 다 모였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는 표현이 참 좋다. 서로를 아껴주고 지켜주는 마음이 가족을 따스하게 감싼다. 사나운 세상을 견디는 힘을 이 크고 둥그런 밥상에서 배우는 게 틀림없다. 함께 하는 밥상이 사라지고, 우리는 점점 외로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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