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이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리다. 산다는 게 뭘까? 부부의 연은 또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 속에는 알콩달콩, 티격태격한 무수한 사연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다 무엇인가?
먼 데를 돌고 돌아서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찾아온다. 한숨과 함께 전해오는 짧은 깨달음, 그렇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변방만 헤매다가 이슬처럼 사라져 간다. 인간 존재의 한계와 왜소함 앞에서 우리는 속절 없이 무너진다. "헛되고 헛되다"는 옛 지혜자의 탄식을 우리도 분명 독백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단지 그것뿐인가. 아닐 것이다. "유일한 선(善)은 앎이다"라고 테스 형이 말했지만,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는 앎을 향하여 다만 질문할 수밖에 없다. 해답이 아니라 궁극을 향한 질문이 허약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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