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샌. 2020. 11. 27. 10:33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 산에 대하여 / 신경림

 

 

몇 년 전 뉴질랜드 트레킹을 떠날 때 어린 손주에게 '높은 산'에 간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할아버지가 가는 곳을 물으면 자동으로 "노픈산"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재미있어 자꾸 물어보곤 했다. 이제는 '높은'과 '산'의 의미를 구분할 줄 알 것이다.

 

노년이 되니까 찾아가는 산의 높이는 나이에 반비례한다. 지금은 체력이 달려 천 미터급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산에는 높은 산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높은 산만 바라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낮은 산에 정을 붙이게 된다. 동네 뒷산은 오르는 산이 아니다. 가만히 들어서는 산이고, 품 안에 안기는 산이다. 길도 순하기만 해서 숨을 허덕일 필요도 없다. 구름을 눈 아래 두고 호령하는 높은 산의 자락에는 낮은 산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작은 풀꽃과 산새들을 거두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간다. 이런 낮은 산을 사랑하게 되는 것 또한 세월이 주는 선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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