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떨어져 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은 날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찬물에 차르르 차르르 씻겨나가는 뽀얀 소리를 듣는다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초록에 물을 준다
꽃잎이 자라는 속도를 한참씩 바라본다
다투고 대립하고 각을 세웠던 날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와 양말을 갠다
수건과 내복을 판판하게 접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느다란 선율이 링거액처럼 몸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 다시 아침 / 도종환
시인이 마음을 정화하듯 하는 행위를 나 역시 집에서 일상으로 한다. 방 쓸기, 설거지와 밥 안치기, 초록에 물 주기, 빨래 개기 등은 퇴직 이후 아내로부터 자진해서 넘겨받은 일이다. 주부 체질인지 이런 일들이 재미있다. 내 작은 움직임으로 집안이 깨끗해지니 일단 기분이 좋다. 가끔은 마음 닦음과 연관시키며 혼자 흐뭇해한다. 이제 컴퓨터를 닫은 다음에는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는 시래기를 박스에 담아서 창고에 넣어야겠다. 그리고 방과 거실을 물걸레질해야겠다. 느릿느릿, 사각사각,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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