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공휴일 / 김사인

샌. 2020. 12. 17. 10:38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히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 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 공휴일 / 김사인

 

 

저 시절 중랑교가 무슨 볼품이 있었을까? 밑으로는 시커먼 중랑천이 흐르던, 높은 빌딩 하나 없는 서울 변두리였다. 그래도 서울 구경이라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가 보다.

 

사진천국이 된 지금는 누구나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다닌다.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어지간한 일반 카메라 성능을 넘어섰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도나 개나 사진을 찍어댄다. 실제로 원숭이가 찍은 사진 전시회가 열린 적도 있다. 돈이 안 드니까 그런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그냥 난사다. 되는대로 찍고는 나중에 삭제 버튼만 누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진 하나를 보더라도 현대인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읽을 수 있다.

 

필름카메라를 쓸 때는 사진 한 장 찍는 데도 정성을 다했다. 필름을 맡기고 현상과 인화가 되어 나오자면 사나흘이 걸렸다. 어떻게 나올까, 기다리는 설렘도 있었다. 디지털 같은 즉시성이 아니다. 지금도 굳이 필름카메라를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과정을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색감이야 디지털 후보정으로 얼마든지 필름 흉내를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필름 시대를 지나서 여기까지 왔다. 중랑천 가족 같은 풍경이 낯설지 않고 정겹다. 그때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 서면 자세가 굳어졌다. 사진 찍을 기회가 자주 있지도 않았다. 지금은 아이들도 유튜브 방송을 하는 시대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미래는 또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까? 지나온 옛날이 자꾸 그리워지는 걸 보니 나도 늙기는 늙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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