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는 5.18을 왜곡한다 / 최진석

샌. 2020. 12. 25. 11:26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왜곡한다.

1980년 5월 18일에 다시 태어난 적이 있는 나는

지금 5.18을 그때 5.18의 슬픈 눈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면서 그들에게 포획된 5.18을 나는 저주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센터, 너릿재의 5.18은 죽었다.

자유의 5.18은 끝났다. 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속았다.

3.1, 4.19, 6.10, 부마항쟁의 자유로운 님들께

동학교도들의 겸손한 님들께

천안함 형제들의 원한에 미안하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자유를 가둔 5.18을 저주한다.

그들만의 5.18을 폄훼한다.

갇힌 5.18을 왜곡한다.

5.18이 법에 갇히다니.

자유의 5.18이 민주의 5.18이 감옥에 갇히다니, 그들만의 5.18을 저주한다.

이제 나는 5.18을 떠난다.

5.18이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죽어라, 그러면 산다.

나는 5.18을 지키러 5.18을 폄훼한다.

그날처럼 피울음 삼키며 나는 죽는다.

5.18아 배불리 먹고 최소 20년은 권세를 누리거라, 부귀영화에 빠지거라.

기념탑도 세계 최고 높이고 더 크게 세우고 유공자도 더 많이 만들어라.

민주고 자유고 다 헛소리가 되었다.

5.18 너만 홀로 더욱 빛나거라.

나는 떠난다. 내 5.18 속에서 나 혼자 살련다. 나는 운다.

5.18역사왜곡처벌법에 21살의 내 5.18은 뺏기기 싫어.

 

- 나는 5.18을 왜곡한다 / 최진석

 

 

이번에 통과된 5.18역사왜곡처벌법에 대해 최진석 교수가 쓴 시다. 시라기보다는 격문에 가깝다. 나도 문재인 정부의 기본 정책에는 동조하지만 이건 아니지 싶다. 노무현 정부 때 강정구 사태가 있었다. 6.25를 대의에 따른 통일전쟁이라고 한 발언을 두고 나라가 몇 달간 시끄러웠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강 교수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는 건 옳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근혜 정부 때는 국사를 국정교과서로 만들려는 어처구니 없는 시도가 있었다. 5.18을 두고도 논란이 많다. 5.18을 비하하고 왜곡하는 주장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왜곡처벌법이라니. 이러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칠 근거도 없어진다. 논리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라도 강제로 막아서는 안 된다. 사상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다. 5.18의 정신은 민주와 자유다. 5.18역사왜곡처벌법은 5.18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일부 정치 세력이 왜곡한다고 왜곡되는 5.18이라면 이미 5.18이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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