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을 만나면 부끄럽다. 나는 한 번도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했다. 황시백 선생은 세상과 불화하면서 먼 꿈을 꾼 사람이다.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올곧게 나아갔다. 선생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교육 민주화 운동에 온몸을 불살랐다. 이런 분들이 나중에는 몸이 상해 일찍 세상을 뜨는 경우를 자주 본다. 선생도 그랬다.
선생은 교사였고, 농사꾼이었고, 목수였다. 몸을 낮춰 세상을 사랑했다. 이 책에는 교육보다 농사짓는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선생은 도시를 떠나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가는 사잇골 농촌 공동체를 꿈꿨다.
집안이 가난했던 선생은 젊었을 때 고생을 심하게 했다. 피를 팔아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지낼 때도 아픈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었나 보다. 교직을 떠나서 농사를 택한 것은 필연의 귀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선생의 자기 수련의 길이었다. 세속적 취미로 인생을 즐긴다는 여유는 선생에게 없었다.
입으로만 나불대는 사람은 많지만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집회에 참여하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자본주의의 단맛을 누리며 살아가는 데 대한 일말의 죄책감은 아닐까. 머리와 몸의 불일치는 부평초 같은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체제의 충직한 하인 노릇을 하면서 머리로만 반항하는 척한다. 반성한다.
<애쓴 사랑>은 선생 사후 남은 사람이 선생의 글을 묶은 책이다. 여기에 실린 선생의 글은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유려하고 깊이가 있다. 시와 산문 각 한 편씩 옮긴다.
논
논, 못물 그득 머금은 논
빛날 땐 어떤 사상보다 빛나고
일렁일 땐 어떤 사랑보다 일렁이네
해 질 녘 검은 산 그림자 잠겨
끝 모르게 깊어 가는 논
아, 깊어 갈 땐 어떤 끝 모를 그리움보다
깊어 가네
달걀
나는 올해 김장밭에 나가 보지도 못했네. 무 배추 갈고 고추 따서 말리고 요즘 사잇골 식구들은 바쁘다. '작업반장' 상기 아우는 그 못 버리겠다던 늦잠 버릇도 걷어차고 농사철 내내 동틀 때 일어나 논에 간다. 퇴근하면 또 해 질 때까지 밭일을 한다. '내가 농사일에 밀리면 형도 병에 밀린다.'는 마음이라 한다. 그래 아우야, 니 마음을 모르겠나. 사잇골 식구들 마음, 동무들 마음을 모르겠나.
나 안 밀릴게.
지난해에는 네 집 김장을 같이 했더랬지. 마리아네, 용명네, 상기네, 우리 집. 김장 날, 잔치도 그런 잔치가 없었다. 올가을엔 기범이 오두막 뒤꼍에도 한 독 묻어야겠지. 다섯 집 김장이다. 열 집 김장을 할 날도 머지않아 오겠지. 조용명이 말한 '꼬질꼬질한 작업복이 어울리는 거지들의 나라' 가장 큰 잔칫날이 되겠지.
어릴 적 고향집에서는 김장을 요즘 너댓 집 하는 만큼 했던 것 같다. 하긴 우리 집 식구가 열둘이었고 거의 김치와 된장으로 겨울을 났을 테니. 농사도 없었으니 아버지 월급으로 간장 된장 담고 김장 담가 겨울날 채비하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는 평생 철도원으로 사셨다. 집도 일본식 철도 관사였다. 늘 군청색 철도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지금도 아버지는 그 작업복 입은 모습으로 떠오른다. 아버지도 눈만 뜨면 일을 하셨다. 꼬질꼬질한 철도 작업복을 입고 집을 고치거나 텃밭 일을 하거나 마당을 다지거나 늘 무슨 일이든 하고 있었다.
철도 작업복 입은 아버지 손을 잡고 내가 걷고 있다. 키는 아버지 허리쯤이다. 경상남도 마산 변두리. 집까지 이삼십 분 거리였을까. 자산동에 있는 '몽고간장' 공장에서 간장을 한 말들이인지 두 말들이인지 커다란 통으로 한 통사서 손수레로 배달을 시키고, 아버지와 나는 손수레 옆에서 집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김장 끝나면 '왜간장'이라고 했던 그 간장, 요즘은 뭐 진간장이라고 하던가, 그걸 한 통 들여놓아야 우리 집은 겨울 채비를 마쳤다. 마산이면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그 문화였겠지. 왜간장은 겨울철 아이들 밥반찬이었다.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깨소금 조금 뿌려 주면 그걸로 밥을 비벼 먹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걷는다. 왜간장에 밥 비벼 먹을 생각으로 나는 좀 행복하다. 고개를 들면 철도 작업모 쓴 아버지 머리가 파란 가을 하늘과 함께 저 위에 있다. 나는 또 생각한다. 오늘 저녁상에 달걀이 나올까?
어쩌다 밥그릇 옆에 날달걀이 놓일 때가 있었다. 참기름 깨소금 친 왜간장 종지와 함께. 아이가 아프거나 입맛이 없어 보일 때 그랬겠지. 뜨거운 밥을 숟갈로 옴팍하게 파 헤집어 그 속에 달걀을 깨 넣고 다시 밥을 덮어 놓고 잠시 기다릴 때, 간장 한 숟갈 넣고 달걀 노란 빛으로 밥을 비빌 때, 그때만 한 행복이 없었다.
나는 요즘 두어 달째 음식 삼키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몸무게가 거의 20킬로 빠졌다. 어떻게든 먹어 내지 못하면 치료고 뭐고 계속할 수 없다고 한다. 자리에 누워 있으면 꿈결인지 잠결인지 아버지가 자꾸 보인다. 여전히 철도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어느 새벽인가, 아버지가 그러신다.
'시백아, 니 우짤라고 그라노? 와 밥을 못 묵노?'
'아부지예, 저도 벌써 육십이 다 돼 갑니더. 그라고 마이 지쳤어예. 안 묵으니 그냥 편안하네예.'
아버지는 쪼맨한 아새끼가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이다. 그리고 한마디 하신다.
'달걀에 비비 묵어라.'
아버지도 밀리지 말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