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서?"
-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 문학할 것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요정 대원각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모은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전 재산을 기부해서 길상사를 창건하는 바탕이 된다.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는 사람은 많아도 삶으로 실천하는 이는 드물기에 '길상화'는 보석처럼 빛난다. 그녀는 창건 법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도대체 어떤 사랑이었을까? 시인만 어리둥절해지는 게 아니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죽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자문(自問)의 소리 하나 들린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네가 남길 말은 무엇이니?" 아우성치는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부끄럽고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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