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오는데 우체국 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다 지쳐 아들아 이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 출금 전표도 대신 써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공직에 있을 때 제대로 했는지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듯
"비 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 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촌로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네 엄마, 네 외할머니를 만난 듯
그들 발밑에 차이고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속 눈에 옷을 입혀야 한다
공부라는 것, 성현의 말씀이란 것,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을 보지 말고
사람 아래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라, 그러면
터널처럼 휑한 그들 가슴 한복판을 가득 채우는 햇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들아 비 오는 날 우체국 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다 지쳐 이 편지를 쓴다
- 따뜻한 편지 / 이영춘
최근의 미투 운동의 바탕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성별이나 지위, 돈으로 차별 받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보듬어주는 그런 마음의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내 욕구 충족의 수단이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 모든 생명붙이도 마찬가지다.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햇볕 따뜻한 봄날, 이 시구가 가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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