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쫄딱 망하기 / 백무산

샌. 2018. 3. 1. 16:22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그 말은 어제오늘 나온 말이 아니다

소설가 백신애가 1930년대에 쓴 글에

요즘 촌부들은 이악해서 도회지 사람들을 속여도 먹는다, 고 썼다

오랜 세월 빨아먹어도 그래도

아직 시골로 남아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시골로 살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반가운 사람들은 도시에서 망하고 왔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토목공사를 벌이지 않고

땅장사를 부업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아이가 시골에 이사 와서

동네방네 졸랑졸랑 자랑을 하고 다닌다

우리 아버지 서울에서 쫄딱 망했어요

망해서 즐거운 것은 아이와 땅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주가 쫄딱 망해서 생긴 것이 땅이다

 

땅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건 대체로 망한 거다

구름의 발길을 따라갔다면 그건 이미 사전에 망한 거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망하게 내버려두는 거다

나의 목표도 망하는 거다

 

망하니까 머리가 땅에 가까워지고

망해야 심장이 우주의 마음에 귀를 연다는 건

우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진 말이지만

 

사람의 인심도 사랑도 대체로 망한 것에서 나온다

인간은 사실 망한 것을 입고 먹고 사는 존재다

 

- 쫄딱 망하기 / 백무산

 

 

<녹색평론> 최근호에 실린 시다. 순탄하게 사는 것보다는 우여곡절을 겪은 인생이 깊이가 있다. 한 번쯤은 쫄딱 망해보는 것도 괜찮다. 인생 학교에는 공짜가 없다. 제대로 배우자면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한다. "망하니까 머리가 땅에 가까워지고, 망해야 심장이 우주의 마음에 귀를 연다." 그래야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린다. 세상에서 졌다고 인생의 패배자는 아니다. 나의 목표도 망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배포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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