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괴물 / 최영미

샌. 2018. 2. 9. 12:09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 괴물 / 최영미

 

 

가끔 만나는 시인 벗으로부터 이분 손버릇에 대해서는 전해 듣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저분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모르는 문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특정인을 변호하고 싶은 게 아니라, 방관자였던 우리의 책임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사안이 터지면 사람만 매도한다. 그보다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문화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게 옳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변한다.

 

'Metoo' 물결이 번지고 우리의 의식을 개혁하는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사회가 정화되어 나가는 한 과정이라고 본다. 사람의 눈이 두려워서라도 몸가짐을 조심한다면 진일보해 나가는 것이다. 이 시에서 눈길을 끄는 연이 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이다. 제 권력을 향유하려는 자들은 대중의 어리석음을 즐긴다. 우리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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