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찾습니다 / 이영혜

샌. 2018. 1. 30. 11:01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 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수사자 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면,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 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은 놈 먹다 버린 것도 좋아,

패거리로 몰려다니길 즐겨 하는, 웃음도 비열한 하이에나 말고

 

수천 권 뜯어먹은 지성인 척 턱수염 도도하게 으스대지만,

강자 앞에선 아첨의 목소리로 선한 초식동물인 척하는,

이중인격 비굴한 염소도 말고

 

아무데서나 혀 빼고 군침 흘려 대며,

할 소리 안 할 소리 쓸데없이 짖어 대거나 아무나 물어뜯는,

날카로운 야성의 송곳니는 유전자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인,

잡개는 더욱 말고

 

높은 하늘 향해

한 자세로 한 몸 꼿꼿이 세운

 

한 향기 한 품위로 천지를 채운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식물성 남자 하나 찾습니다

평생 배필로 삼아

생을 다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그 몸 이룬 탄소 원자 소멸할 때까지

한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 찾습니다 / 이영혜

 

 

인류 진화 초기에는 순하고 착한 식물성 종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생의 정글에서 생존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결국은 누가 살아남았겠는가. 정글은 난폭하고 음흉하고 비열한 유전자를 원한다. 안 그런 척하지만 여자들 역시 마초적 남자에게 끌린다. 내 새끼를 보호하는 데 그런 남자가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식물성 남자를 찾는 건 좋은데 남성으로서의 매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식물성 남자들과 식물성 여자들이 모인 공화국 하나 만들 수 없을까. 우리의 먼 포유류 조상처럼 공룡의 발자국 소리에 두려워 떨며 숨어 있는 식물성 인간들이 아직도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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