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샌. 2019. 1. 2. 11:06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물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소년 시절 겨울 풍경을 소환해 본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봐도 온종일 논 것밖에 없다. 학원도 없었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잔소리도 없었다. 낮에는 앞 논에 나가 '씨게또'를 타고, 양지바른 마당에서 뜀박질하며 놀았다. 밤에는 한 방에 모여 깔깔대며 즐거웠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 어른 흉내 내며 화투도 쳤다. '뻥'이라는 걸 많이 했다. '아이 젠 그라운드'에도 열심이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아보면 단조로운 놀이였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TV도 라디오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추억 속 그 겨울은 따스했다.

 

이제는 실내 온도를 25도로 맞춰 놓고, "아이 추워라" 하면서 흔들리는 나무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기만 한다. 마음은 서늘하고 휑하다. 추위야 그 시절이 더하면 더했을 터다. 이 겨울,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길거리 노숙자를, 뒷산 고라니를 한순간이라도 걱정한 적 있던가. 어젯밤 손주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던가. 이 겨울이 쓸쓸한 이유를 알겠다. 나는 너무 깊이 타락해 있다. 다만 그것이 슬프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양 여자 / 이대흠  (0) 2019.01.19
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곽효환  (0) 2019.01.12
사랑 / 김중  (0) 2018.12.25
무심천 / 도종환  (0) 2018.12.20
옛날 사람 / 곽효환  (0) 2018.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