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광양 여자 / 이대흠

샌. 2019. 1. 19. 11:25

청보리 필 때는 청보리처럼 푸르게 웃음 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잦은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몸 속 탱자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 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 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터로 있는 게 즐거워서 오래도록 눈 마주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찬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살을 아리게 하는 여자 덖은 찻잎에 숨은 그늘처럼 오래도록 감추어져 있다가 맑은 찻물로 우려지곤 하는 여자 내 오래 사랑하였고 한번도 미워한 적 없었던 여자 너무 깊이 사랑했으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 모두에게 버림받고 아파 울더라도 곁에 두고 싶었던 여자 여자 몸 영 못 가누게 되어 기저귀 차고 지내게 되면 내 손수 기저귀 갈아주고 고운 노래 불러주고 싶었던 여자 내 숨 막힌 세월 몸통 터주고 제 아픔 하나도 나누어 주지 않았던

 

나쁜 그 여자, 생각하면 목련길이 떠올라서 세상의 모든 밤을 봄밤으로 만드는 여자 꽃에 허기진 내가 밤 깊도록 잠 못 이루고 검게 바랜 목련 꽃잎에 눈물 떨구게 하는 여자

 

과냥과냥 불러보면 어느날 문득

자응자응 대답할 그 여자

 

- 광양 여자 / 이대흠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와 공명을 이루는 시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에게 모든 여자는 다 이러하지 않을까. 즉, 환상 속의 여자를 창조해 낸다. 만약 결혼으로 골인했다면 계속 여신(女神)으로 남아있지는 못했으리라. 시 중간쯤에 나오는 '너무 깊이 사랑했으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이라는 구절이 말해준다. 헤어졌기 때문에 광양의 그 여자는 '광양 여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콩깍지일지라도 이 또한 청춘의 한 특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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