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도 '햇살 하느님'이 찾아와 계신다. 화분의 화초들이 햇살 하느님을 향해 경배를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햇살 하느님과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그리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뒷산길에서는 가을 햇살을 맞으러 일부러 풀밭에 앉는다.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의 손길이 부드럽고 따스해 기도하듯 저절로 눈이 감긴다. 살랑살랑 바람의 애교까지 더해지면 천국이 따로 있지 않다.
시인을 통해 나도 햇살의 말씀을 듣는다. "아무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소중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이 주(主)고, 무엇이 종(從)인가? 네, 명심할 께요, 햇살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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