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굴비 / 오탁번

샌. 2020. 3. 11. 12:11

수수밭 김매던 아낙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녁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떡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 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 굴비 / 오탁번

 

 

웃어보려고 시 한 편을 골랐다. 그런데 술자리의 Y담 쯤으로 여기고 껄껄거릴 수 없다. 웃다가, 가슴이 답답하다가, 나중에는 울화통이 터진다.

 

김훈 작가의 소설 <흑산>에는 조선 후기 민중의 고통이 잘 나타나 있다.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민중의 삶은 파탄 나고 유랑 거지들이 전국을 헤맸다. 굶어 죽는 아낙과 아이들이 즐비했다. 이 시에 그려진 부부는 차라리 양반에 속한다. 특정 계층 부는 힘 없는 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형성된다. 봉건 시대나 왕조 시대, 또는 제국주의 시대의 행태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오히려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변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가? 곧 총선이 다가오는데 정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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