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비밀번호 / 문현식

샌. 2020. 3. 23. 10:44

우리 집 비밀번호는

0000000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000 0000는 엄마

00 000 00는 아빠

0000 000는 누나

할머니는

0 0  0   0

0  0   0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 비밀번호 / 문현식

 

 

착상이 빛나는 동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의 리듬으로 엄마, 아빠, 누나, 할머니를 구별하는 예민함에 가족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 빨리 얼굴 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어락 소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리라.

 

그중에서 백미는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다.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눈이 침침해서 숫자판의 번호가 잘 안 보였을 것이다. '보 고  싶   은 / 할  머   니'라고 생전에 할머니가 숫자판을 누르던 느린 리듬으로 할머니를 기억하는 어린이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문현식 시인의 다른 동시도 찾아 읽어본다.

 

 

셋이 앉아서

돌아가며

웃긴 얘기를

하나씩 하기로 했다

 

나는 친구와 한 자전거로

내리막길 달리다가

자갈밭에 굴러

피투성이가 되었던 일을 말했다

 

유진이는 계단에서 아래로 날아 떨어져

턱이 퍼렇게 멍들어

수염 난 어른처럼

얼굴이 변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재민이는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그때 다친 발가락이

비가 오는 날이면 간지럽다고 했다

 

우리는 웃긴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아팠던 얘기를 하며 웃었다

 

- 그때는 아팠지 / 문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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