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린 봄을 업다 / 박수현

샌. 2020. 3. 31. 10:43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은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이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올려놓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얕은 숨을 쉬며 옹알거렸다

멀리서 온 그 말씀, 하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포대기를 추슬렀다 출렁,

한 뼘 팔이 더 길어졌다

 

- 어린 봄을 업다 / 박수현

 

 

할머니가 손주를 대하는 마음은 할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여성이 가진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남성이 흉내 낼 수 없다. 나를 봐도 손주가 옆에서 떠들면 귀찮아진다. 빨리 가라고 제 어미에게 눈치를 준다. 그러나 아내는 그저 손주가 이쁘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나'가 없이 모든 걸 내어주려고 한다. 여성은 열 달간 생명을 품었다가, 낳은 뒤에는 안고 업으며 기른다. 아기를 보살피고 양육하며 일심동체가 되는 경험이 남성한테는 결여되어 있다. 여린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여성과 남성은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어머니가 되고, 이제는 손주를 등에 업은 할머니의 모습은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시의 뒷부분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이미 다 커 버린 손주지만 다음에 찾아오면 나도 한 번 업어봐야겠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올려놓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얕은 숨을 쉬며 옹알거렸다

멀리서 온 그 말씀, 하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포대기를 추슬렀다 출렁,

한 뼘 팔이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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