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안내 방송 / 주미경

샌. 2020. 4. 6. 10:55

아, 아, 오늘

늘푸른공원에 약을 친다고 합니다.

단풍나무 길 거위벌레 씨

아기 방 창문 꼭 닫아 주세요.

벚나무 길 자벌레 씨

아침 운동 참아 주시구요.

꽃등에 씨 라일락꽃은

비 온 뒤에 찾아 주세요.

아, 아,

돌배나무 길 비단벌레 씨

비단 마스크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참, 말매미 씨

바쁘시더라도

때맞춰 사이렌 부탁합니다.

 

- 안내 방송 / 주미경

 

 

아파트 단지 안 수목에 약을 친다는 안내 방송이 가끔 나온다. 약이 들어갈 수 있으니 저층 세대는 창문을 닫아 달라고 당부하는 방송이다. 그런데 이 시를 보고 뜨끔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볼 줄 알았지, 나무에 살고 있을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 신선한 시도 나온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도 분명히 있겠다. 우리 문명이 너무 앞으로만 질주하는 것은 아닌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는 자연계의 경고인지 모른다. 언젠가는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겠지만 그때에도 우리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 관성적 삶을 되풀이한다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 것이다. 폭주 기관차에 무엇이 제동을 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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