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체제에 관하여 / 유하

샌. 2020. 4. 24. 09:31

횟집 수족관 속 우글거리는 산낙지

푸른 바다 누비던 완강한 접착력의 빨판도

유리벽의 두루뭉술함에 부딪혀

전투력을 잊은 채 퍼질러 앉은 지 오래

가쁜 호흡의 나날을 흐물흐물 살아가는 산낙지

주인은 부지런히 고무호스로 뽀글뽀글

하루분의 산소를 불어넣어 준다

산낙지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

여기 쌩쌩한 놈들이 있는뎁쇼

히히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 달라고

살아 있어 달라고

그러나, 헉헉대는 그대들의 숨통 속으로

단비처럼 달콤히 스며드는 저 산소 방울들은

진정 생명을 구원하는 손길인가

투명한 수족관을 바라보며 나는

투명하게 깨닫는다

산소라고 다 산소는 아니구나

저 수족관이라는 틀의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산소도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한 의미로

뽀글거리고 있는 것 아니냐

 

- 체제에 관하여 / 유하

 

 

유하 시인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 실린 시다. '바람'은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유혹을 가리키는 말일 게다. 이 시에서 묘사하는 수족관에 갇혀 우글거리는 산낙지가 자본주의에 포획된 인간의 모습이다. 가게 주인이 산낙지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자신에게 돈을 벌게 해 주기 때문이다. 결코 산낙지를 동정해서가 아니다. 그 진실을 깨달을 때 뽀글거리는 산소 방울은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다.

 

산낙지가 수족관에 갇힌 제 신세를 알 수 있을까. 감질나는 한 방울의 산소에 감지덕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자기가 태어난 넓디넓은 바다 꿈을 꾸는 산낙지가 있을까. 코로나19라는 충격이 혹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진정되면 그동안 못한 쇼핑과 여행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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