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바느질 / 박경리

샌. 2020. 5. 5. 11:38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 바느질 / 박경리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한 게 군대에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군대 생활을 하자면 실과 바늘이 필수였다. 그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바늘귀에 실을 꿰 드리는 게 내 담당이었다. 지금은 아내한테서도 바느질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꿰매야 할 정도로 해진 옷을 입지도 않거니와, 어지간하면 세탁소에 맡기기 때문이다. 어쩌다 돋보기를 쓰고 바느질하는 아내 모습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어머니, 할머니로 이어지고 더 위로는 모든 여성 선조들의 모습까지 아내한테 오버랩 되어 보인다.

 

원숙한 대작가의 모습이 이 시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3년 전에 작가의 원주 생가에 갔던 느낌도 살아난다. 여행, 놀이, 쇼핑 대신 읽고 쓰는 일로 평생을 매진하신 분이다. 낮에는 텃밭을 돌보고 밤에는 바느질하며 담백하게 소일하셨으리라. 누구나 살아온 흔적이 한 땀 한 땀 뜬 바느질처럼 남는 게 아닐까.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게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기워 온 내 바느질 흔적은 어떨까. 만약 숙제를 검사하시는 분이 있다면 솜씨보다는 정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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