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샌. 2020. 5. 25. 10:40

벌은 꽃 속에,

꽃은 정원 속에,

정원은 토담 속에,

토담은 마을 속에,

마을은 나라 속에,

나라는 세계 속에,

세계는 하느님 속에,

 

그래서, 그래서, 하느님은,

작은 벌 속에.

 

-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일본 센자키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온순했다.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재혼한 뒤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어른들이 정한 남자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그녀가 글 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방탕한 남편과의 불화와 병으로 괴로워하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 짧은 약력과 시 몇 편으로 그녀를 얼마나 알 수 있겠냐마는 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슬퍼진다. 꼭 가네코 미스즈만이겠는가. 비운의 천재라 불린 허난설헌도 스물일곱에 이승을 떴다. 그 밖에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채 꿈과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시든 인물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삶과 죽음 역시 하나라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시인은 예토(穢土)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았는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들녘 끝에서

파란 작은 새가 죽었습니다

     춥디추운 해 저물녘에

 

그 주검 묻어주려고

하늘은 흰 눈을 뿌렸습니다

     깊이깊이 소리도 없이

 

사람들은 모르는 외딴 마을에

집도 함께 서 있습니다

     하얗고 하얀 잠옷을 입고

 

이윽고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

하늘은 빼어나게 맑았습니다

     파랗게 파랗게 아름답게

 

조그맣고 어여쁜 영혼

하느님 나라 가는 길

     넓고 넓게 열기 위해서

 

- 눈 / 가네코 미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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