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프로레슬링은 쑈다 / 유하

샌. 2020. 6. 4. 11:13

박통 시절, 박통터지게 재미있었던 프로레슬링

김일의 미사일 박치기에 온국민이 들이받쳐서

박통터지게 티브이 앞에 몰려들던 프로레슬링

흡혈귀 브라쉬

인간산맥 압둘라 부처

전화번호부 찢기가 전매특허인 에이껭 하루까

필살의 십육문 킥 자이안트 바바

빽드롭의 명수 안토니오 이노끼

그 세계적인 레슬러들을 로프 반동

튕겨져 나오는 걸 박치기! 당수!

또는 코브라 트위스트, 혼줄을 내주던

김일 천규덕의 극동 태그매치 조

 

저녁 여덟시면 나를 어김없이 만화가게에 붙잡아 놓던

그 흥미진진한 프로레슬링이

어느 순간 시들해진 건 무슨 이유일까

왜 모두들 외면했던 것일까 프로레슬링 유혈 낭자극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통이 죽어서?

김일 같은 스타 레슬러가 안 나와서?

 

항간에 떠도는 루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국내파 레슬러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쑈다라고 외친 다음부터라는데...

사건의 전모인즉슨, 자신과 비기기로 각본을 짰던 김일이

약속을 어기고 넉 사 자 굳히기를 해버렸다지 아마

이에 열이 받은 장영철이 마이크를 잡고 장충체육관이 떠나가도록

프로레슬링은 쑈다! 폭로했다는 얘기

믿거나 말거나지

 

그러나, 어디 쑈가 한두 가지인가

여기저기서 그건 쑈였다 밝혀지는 게 한두 가진가

남 박통터지는 거 되게 좋아했던 박통의 근엄한 얼굴도

그의 정치도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도, 실은

쑈쑈쑈였다!

그 밑에서 같이 태그매치하던 놈들까지

프로레슬링 심판처럼 으레 반칙을 방관하던 놈들까지

회고록이다 뭐다 지금 떠들어대지 않는가

 

레슬링 쑈는 한두 사람 박통터지면 그만이지만

정치 쑈는 온 국민을 박통터지게 하지

지금도 링 뒤에서,

첫 판은 네가 알밤까지 엉덩방아찧기 풍차돌리기

둘째 판은 내가 헤드록 날개꺾기 보디슬럼

박통 맞대고 통박 굴리는 놈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프로레슬링은 끝나지 않았어

프로레슬링은 쑈다라는 말도 유효해

매일매일 애꿎게 로프 반동 당하는 우리 국민들

역으로 놈들을 드롭킥으로 넘어뜨린 후

새우꺾기 해버리는 날까지

원 투 쓰리

땡땡땡

 

- 프로레슬링은 쑈다 / 유하

 

 

왕년의 인기 프로레슬러인 천규덕 선수가 지난 2일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천규덕 씨는 김일, 장영철 선수와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분이다.

 

1960년대 프로레슬링은 권투와 함께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프로레슬링이나 권투 시합이 열리는 날은 거리가 텅 빌 정도였다. 사람들은 흑백TV 앞에 모여앉아 가슴 졸이며 우리 선수를 응원했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 역시 시합 시간이 되면 눈치를 보며 주인집 안방에 찾아갔다. 마음껏 소리 지르지 못하니 더 조마조마했다.

 

시합은 정해진 순서가 있었다. 김일 선수가 초반에는 고전한다. 난폭한 외국인 선수는 반칙을 하며 김일을 괴롭힌다. 이마를 찢어 피가 낭자한 날도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면 김일의 박치기가 터진다. 오른손으로 상대 머리를 잡고 온몸을 비틀어 박치기를 하면 거구가 꽈당하고 쓰러진다. 원 투 쓰리, 그걸로 끝이다. 김일 선수가 또 이겼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하며 손뼉을 친다. 그 시절에는 삶의 고단함을 위무해 준 프로레슬링의 역할이 대단했다. 집권층도 그 점을 노렸지 않았나 싶다.

 

당당한 체구의 천규덕 선수 특기는 당수였다. 천규덕 선수는 항상 검은 타이즈를 입은 게 특이했다. 그리고 선수 중에서 제일 점잖은 이미지였다. 로프 반동으로 튀어나오는 상대 선수 가슴에 당수 한 방을 날리면 얼마나 강력했던지 상대는 공중에 붕 떴다가 쓰러졌다. 당시에도 너무 과장된 몸짓이 아닌가, 라는 의심은 들었던 건 사실이다. 어찌 됐든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 뒤에 어느 순간부터 프로레슬링은 인기가 시들해졌다.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폭로가 기름을 부었다고 한다. 사실 프로레슬링보다 더한 게 정치 쇼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정치는 여전히 인기 있는 걸 보면 꼭 그 발언 탓만은 아닌지 모른다. 쇼인 줄 알면서도 즐기는 구경거리는 한둘이 아니다.

 

가끔 들리는 유명인의 죽음은 그로 대표되는 한 시대의 종언을 말해준다. 고인은 김일, 장영철 선수와 함께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분이다. 이제 세 분 모두 사라졌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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