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샌. 2020. 6. 17. 10:00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여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 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좀 있으면 일흔이 되는 나는 어쩌나. 일흔,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니 본 적 없는 낯선 놈이 가까이 와 있다. 세월 참 빠르다, 라는 말은 이제 너무 진부하다. 인디언은 한참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선다는데,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란다. 빈 껍데기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오래 멈춰있어야 할까.

 

얼마 전에 선배한테서 문자로 연락이 왔다. 자식 결혼시킬 때 축의금을 못 냈으니 통장번호를 알려 달란다. 내 자식 출가시킨 게 벌써 9년 전 일이다. 가까이 교류를 한 선배가 아니었기에 혼사에 왕래한 기억이 없다. 선배는 옛 기록을 보다가 내 이름을 발견했는가 보다.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나는 물었다. 선배, 어디 아파요? 나도 때가 되면 벌여놓았던 세상일을 깔끔히 정리하고 싶을지 모른다. 홀가분해지고 싶은 것이다.

 

쉰이 이럴진대 일흔 세월의 무게는 얼마큼 될까. 도리어 많은 것을 덜어내서 가벼워져야 할까. 지나온 길, 가야 할 길, 모조리 아득하다. 오늘도 나는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사람으로 산다는 건 만만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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