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물 끓이기 / 정양

샌. 2020. 7. 2. 10:53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 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 물 끓이기 / 정양

 

 

살다 보면 속 끓일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나라를 구한다든지, 거대 악과 싸운다든지, 멋진 명분을 앞세우는 일에 큰소리를 칠 수 있다면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열 받는 대부분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이다. 그래서 더 자괴감에 빠진다. 호랑이가 울 밑에서 으르릉대도 코 골며 잠잘 수 있지만, 모기 한 마리 왱하고 날아다니면 속이 타고 신경이 곤두선다. 다산 선생이 그럴진대 우리 같은 범인이야 오죽하겠는가.

 

어찌 된 것이 피해자는 간 졸이며 고개를 숙이고, 가해자는 오히려 떵떵거리며 당당하다. 아파트 생활의 층간소음도 한 예다. 위층에서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열 받는 게 더 속상하다. 그따위 일로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게 더 절망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냄비 속 물은 뽀글거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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