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중은(中隱) / 백거이

샌. 2020. 7. 14. 10:33

大隱住朝市

小隱入久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似出服似出

非忙亦非閑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君若愛游蕩

城東有春園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君子欲高臥

但自深俺關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賤即苦凍餒

貴即多憂患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

 

제대로 된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있고

은자입네 하는 이들 산야로 들어가지만

산야는 고요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고

조정과 저자는 너무 소란스럽네

그 둘 모두 한직에 있는 것만 못하니

중은(中隱)이란 일 없는 직에 머무르는 것이라

출사한 것 같으면서 은거한 것 같고

바쁜 것도 그렇다고 한가한 것도 아니라네

몸과 마음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추위와 주림도 면할 수가 있으며

한 해가 다 가도록 해야 할 일 없지만

달 따라 녹봉은 꼬박꼬박 나온다네

그대 만약 산에 가길 좋아한다면

성 남쪽에 아름다운 가을 산 있고

그대 만약 노닐기를 좋아한다면

성 동쪽에 봄마다 풍경 좋은 곳이 있고

그대 만약 술이라도 생각나는 날이면

때때로 술자리 손님이 될 수도 있으며

낙양에는 군자입네 하는 이들 많으니

한 데 섞여 온갖 말 나눌 수 있네

그대 만약 편히 누워 조용히 지내고 싶으면

다른 것 말고 대문만 닫아두면 될 테니

찾아오는 귀한 손님 있을 리 없고

대문 앞이 소란하고 바쁠 일도 없네

사람으로 태어나 한평생을 살면서

두 가지 모두 보전키가 쉽지 않으니

천해지면 추위와 배고픔을 겪게 되고

귀해지면 걱정과 환란 그치지 않네

오직 하나 힘이 없는 관리가 되면

그 몸이 복되고 편안해질 터이니

막힌 것과 터진 것 넉넉함과 모자람

그 네 가지 사이에서 살게 되리라

 

- 중은(中隱) / 백거이(白居易)

 

 

백거이(白居易)의 '거이(居易)'는 '쉽게 산다'는 뜻일까. 쉽게 사는 비결을 여기에 풀어 보이고 있다. 한직(閑職)의 관리 노릇을 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유유자적 살아가는 삶이다. 그걸 '중은(中隱)'이라고 이름 붙였다. 조정과 저자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대은(大隱)'은 걱정과 환란을 떠안아야 하고, 조용한 데를 찾아 산속으로 숨어드는 '소은(小隱)'은 가난과 쓸쓸함을 피하기 어렵다. 둘 다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공자는 살면서 '시중(時中)'을 제일 어렵다고 했다. 때와 상황에 따라 바르게 처신하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답이 정해진 길은 없다. '중은' 역시 하나의 길이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적당한 거리 두기', 요사이 유행하는 코로나19가 '중은'을 가르쳐주고 있는지 모른다. '중은'을 권하는 데는 백거이의 개인적인 관리 생활의 체험이 분명히 들어 있을 것이다.

 

이 시만 놓고 보면 백거이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다. 중국은 자연으로 숨는 은사(隱士)를 숭앙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소은'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이 시는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시에서 느껴지는 냉소적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은'을 찬미한다기보다 제 만족과 무사안일을 탐하는 '중은'의 속물성을 힐난하는 게 아닐까. 백거이의 가려진 본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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