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유언 / 류근

샌. 2020. 7. 22. 11:14

절대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되지 말아라.

희생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깨끗한 사람 되지 말아라.

마음이 따뜻해서 남보다 추워도 된다는 생각하지 말아라.

앞서 나가서 매맞지 말아라.

높은 데 우뚝 서서 조롱 당하지 말아라.

남이 욕하면 같이 욕하고

남이 때리면 같이 때려라.

더 욕하고 더 때려라.

남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웃어주지 말아라.

실패하면 슬퍼하고 패배하면 분노해라.

빼앗기지 말아라.

빼앗기면 천배 백배로 복수하고 더 빼앗아라.

비겁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비겁해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하느님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큰 교회 다녀라.

세상에 나쁜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부끄러운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양심과 선의는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라.

너보다 못나고 덜 가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패배자들을 경멸하고 혐오해라.

너에게 기회와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 잘 보여라.

항상 그들과 동행해라.

들키지 말아라.

앞에서 못 이기면 뒤에서 찔러라.

지지 말아라.

이기고 짓밟고 넘어서라.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확실하게 줄을 서라.

중도는 죽는다.

약자를 이용해라.

어디서든 페미니스트를 자처해라.

기회주의자들에게 잘 배워라.

위선자들을 조심하되 위선엔 능해야 한다.

너의 유식과 성찰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게 해라.

무슨 수를 써서든 비싼 밥 먹고 비싼 잠 자라.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라.

벗은 거지는 굶고 입은 거지는 먹는다는 말 명심해라.

그러나 겉으로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처세에 도움이 된다.

너보다 힘 센 자들에게 인사 잘 하고 다녀라.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 하지 말아라.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 하지 말아라.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오직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세상의 정의를 믿지 말고 네 안락의 나침반을 믿어라.

세상에 정의란 없다.

오래 살아라. 명심해라.

 

- 유언(아들, 딸에게) / 류근

 

 

'서서히, 눈치채지 못하게' - 이것이 악마의 술수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된 걸까? 다들 미쳐서 미친 줄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저런 걸로 울분을 토하지만,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내면화된 자본주의의 악령이 아닐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 그마저 맘몬에게 항복한 건 아닐까? 코로나19 속에서 장마가 찾아오고, 잠시 비 그친 사이 이 시를 읽는 아침이 우울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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