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샌. 2020. 7. 7. 10:58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중을 나온 채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마침내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은 채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주는

새까만 아이였던 마음으로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

 

목적 없이도 손 흔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에고 있다는 걸 알고 싶다

 

-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마을 앞으로 중앙선 철로가 지나갔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증기기관차가 희고 때로는 진한 회색 연기를 뿜으며 달렸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나면 아이들은 발길을 멈추고 기차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개울에서 놀다가도 기차가 지나가면 모두가 한 방향으로 주목하는 시간이었다. 열차라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동전만 한 창 뒤에서 승객이 따라 흔드 손도 봤다. 일부 짓궂은 아이는 팔뚝질을 하며 괜히 기차에 화풀이를 했다.

 

이 시는 <수학자의 아침>에 실려 있다. 달콤한 산문에 비해 김소연 시인의 시는 어렵다. 마치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쓴 것 같다. 그나마 이 시가 제일 무난하게 읽혔다. 잠시 기차의 풍경이 있던 나의 유년으로 돌아간다. 그때 흔들던 고사리손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렘의 손짓이었을까.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렇다고 지금은 환해졌을까. 너무 멀리 왔다는 것, 그리고 너무 많은 걸 떠나보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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