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속 빈 것들 / 공광규

샌. 2020. 2. 19. 12:20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 속 빈 것들 / 공광규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가는 것.

비우고 또 비워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도덕경> 11, 16, 48장의 내용이다. 노자는 비움의 철학자다. <도덕경>은 비움을 노래하는 시집이다. 비움은 <금강경>의 '나 없는 나'와도 통하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무(無)가 유(有)를 배척하는 건 아니다. 둘은 서로를 품고 있다. 미리내에 가면 유무상통(有無相通) 마을이 있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실버타운이다(부부가 입주하자면 보증금 2억에 월 생활비가 200만 원 정도 드는데, 더 나이 들면 저런 시설에 들어가야 하지 않나 혼자만 속으로 생각을 한다). 삶과 죽음이 다른 게 아니라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삶 속에 죽음이 들어 있고, 죽음 역시 삶과 별개가 아니다. 이쪽에서 보면 가는 것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오는 것이다. 현상의 한 편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비움의 의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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