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작년 봄, 제주도에 갔을 때 '시인의 집'을 찾아갔었다. 검은 현무암이 양떼처럼 흩어져 있는 조천 바닷가에 시인의 집은 낮고 겸손하게 앉아 있었다. 덜컥 새집을 짓는 게 아니라 백 년 된 버려진 집을 손봐서 들어간 시인의 따스한 마음이 읽혔다. 창밖으로 펼쳐진 조천 바다의 저녁 무렵 풍경이 쓸쓸하면서 나른했다.
나도 가끔 꿈을 꾼다. 서해 바닷가의 외딴 곳, 쓸쓸한 풍경 속 늙은 집 하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삐걱거리는 툇마루에 앉아 매일 석양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이젠 아침 해의 눈부심은 부담스러운 나이니까. 그곳 어딘가에 '석천'이라는 순한 마을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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