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샌. 2020. 2. 9. 11:29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여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첫 연에 나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에 대해 자야는 이렇게 설명한다. 백석과 자야가 오순도순 살던 청진동 시절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자야는 백석에게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를 샀다.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백석이 좋아한 건 물론이고, 다음날 그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와서는 "여보! 오늘 아무개를 만났는데, 이 넥타이 나한테 참 잘 어울린대"라고 했다며 기뻐했다. 그 뒤로 백석은 자야가 선사한 그 넥타이만 매고 다녔다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의 사연이다. '고운 사람'이 자야인 건 말 할 나위도 없다.

 

백석이 외면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세속적 욕망과 함께 전근대적인 결혼 제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백석과 자야는 사랑하면서도 정식으로 결혼할 수는 없었다.

 

좋은 날씨, 가난한 동무의 새 구두, 자야가 사 준 넥타이, 적은 월급, 코밑수염, 달재 생선 지진 맛의 기대. 이 시에서는 백석이 느낀 작은 행복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백석이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백석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소소한 일상의 행복,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사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0) 2020.02.24
속 빈 것들 / 공광규  (0) 2020.02.19
자야오가(子夜吳歌) / 이백  (0) 2020.02.04
가벼운 금언 / 이상희  (0) 2020.01.29
아귀들 / 정현종  (0) 2020.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