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귀들 / 정현종

샌. 2020. 1. 23. 12:35

계곡마다 식당이 들어차고

물가마다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이 나라 산천 가는 데마다

식당이요 카페요 레스토랑뿐이다.

굶어 죽은 귀신들이 환생을 해서 저렇게 됐을 것이다.

또 다른 아귀들은 몰려들어 아귀아귀 먹는다.

(다 아는 얘기지만

대학가도 도시의 골목도

식당과 술집으로 미어진다!)

한 아귀인 나는 토종닭을 시켜 먹으며

이 천박한 나라를 개탄하고 개탄한다.

이 나라 이 국민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 땅의 계곡들아 대답해다오.

바다야 강물들아 대답해다오.

아귀들 대답해다오.

 

- 아귀들 / 정현종

 

 

"진지 드셨니껴?"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의레 하던 인사말이었다. 제 때 끼니를 차려 먹기 어렵던 시절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던 말이다. 아마 우리 나이대가 보릿고개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선조들의 수 천 년 배고픔의 한이 내리물림 되어서인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후손들은 아귀로 변했다. 전 국토가 식당과 술집, 카페로 뒤덮여 있다. 하물며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가 풍경도 다르지 않다. 못 먹고 마신 귀신이 달라붙은 것임에 틀림없다.

 

전에 독일 연수를 갔을 때 식당이나 술집이 너무 없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도심을 벗어나면 식당 찾기가 어려웠다. 어느 때는 한 시간 넘게 달려서 겨우 허름한 식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땅덩어리가 넓은 탓도 있지만 우리와는 너무 다른 문화였다. 이젠 우리도 차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저녁 시간에 TV를 틀면 경쟁하듯 나오는 먹방 프로를 개탄한다. 식탐을 그리 과장되게 드러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부 장면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의식주는 인간 생활의 기본이다. 기본일수록 지켜야 할 품위가 있다. 그러면서 아침 시간에는 다이어트를 하라고 난리다. 이만큼 살게 되었으면 제정신을 차릴 때도 되었다. 이 땅의 계곡이나 강물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무리 먹고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 형벌을 우리는 받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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