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온돌방 / 조향미

샌. 2020. 1. 4. 16:45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 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니 아니 그보다

품어주고 키워주고 익혀주지 않는 것 없던

향긋하고 달금하고 쿰쿰하고 뜨겁던 온돌방이었으면

 

- 온돌방 / 조향미

 

 

아랫목에는 늘 이불이 펴져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언 몸으로 방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어서 몸 녹이라고 이불 한쪽을 들어주셨다. 발에서 온몸으로 온기가 짜르르 전해졌다. 벼슬한 것처럼 당당하게 놀 수 있었던 그 시절이었다.

 

저녁에 뜨끈뜨끈하던 온돌방은 새벽이 되면 싸늘하게 식었다. 아이들은 서로 아랫목으로 파고들며 이불을 당기기 바빴다. 일찍 깨신 할아버지는 군불을 한 번 더 넣으시고, 천천히 마당을 쓰셨다. 잠 덜 깬 귀로 삭삭거리는 빗질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잔뜩 웅크린 채 마루에 서면, 가마솥에서 하얀 수증기가 쌕쌕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양은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 담아 대충 세수를 하고 남은 물은 마당에 휙 뿌렸다. 사르륵 소리를 내며 물은 초승달 모양의 무늬를 남기고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김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 소리와 무늬를 듣고 보고 싶어 억지로라도 세수를 하지 않았나 싶다.

 

따스하기로 치면 요사이 아파트가 훨씬 나을 것이다. 옛날 시골집에 단열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때다. 기록된 연평균기온을 봐도 그때의 겨울이 더 추웠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겨울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추억의 미화 현상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향긋하고 달금하고 쿰쿰하고 뜨겁던' 그 온돌방에서 하룻밤만이라도 다시 한 번 자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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