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이 / 이븐 하짐

샌. 2020. 1. 15. 11:06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곳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 나이 / 이븐 하짐

 

 

괴테가 그랬던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하루가 채 안 된다고. 우리가 볼 때 세상의 복이란 복은 혼자 독차지한 것 같은 괴테인데, 인간에게 허용된 행복한 시간은 이렇게 야박하다. 시인이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한 말도 괜한 엄살은 아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내 나이는 몇 살일까? 환희로 전율하던 시간을 모으면 몇 분이 될까. 대부분은 어릿광대의 춤, 바보의 지껄임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 지칠 줄 모르는 욕망, 값싼 절망과 위로로 채워져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나의 한 부분이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다. 환희의 순간만이 내 삶은 아니다. 나는 결코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겠다. 원래 인간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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