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한 웅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요즘 들어 깜박하는 일이 잦다고 친구가 말했다. 시내에 나간 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헷갈린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젊을 때 영민했던 친구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렇게 변해간다. 우리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약 먹는 건 깜박 잊을 수 있지만, 나이 먹는 데는 깜박이 없다. 튜브로 음식물을 주입하듯, 해가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강제로 집어넣는다. 늙어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느낌이다. 튜브를 빼낼 의지조차 없다면 나이를 먹는다고 살아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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