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얼떨결에 / 고증식

샌. 2019. 12. 23. 10:11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는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에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 얼떨결에 / 고증식

 

 

올 한 해도 꼬리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일 년이 얼떨결에 후딱 지나간 것 같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가지 아닐까. 얼떨결에,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죽을 때도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겠지. 바람에 날리는 검불같이 가벼운 게 인생이다. 연말의 이 헛헛함을 잊고자 사람들은 망년회를 돌아다니는지 모른다.

 

알차게, 의미 있게 살아보자 다짐하지만 야속한 세월 앞에서 늘 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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