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26

장마 시작

세찬 빗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1시였다. 커튼을 젖히니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검은 그림자가 창에 어른거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오래 뒤척였다. 중부 지방에도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 시작 예보가 있었기에 어제는 한껏 햇볕을 쬐기 위해 경안천에 나갔다. 반바지 차림이었다. 앞으로 3주 정도는 우중충한 날씨를 견뎌야 할 것이다. 당연히 햇빛도 그리워지겠지. 따가운 햇살이지만 싫지가 않았다. 그늘을 마다하고 세 시간 가까이 햇빛 속을 걸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교각 옆에서 쉬고 있을 때 떠오른 말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내 길을 가는 거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경우에는 타인과 비교할 때 위축된다. 비교의 대상은 늘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다. 돈이 많든지, 자식 농..

사진속일상 2024.06.30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이 책을 쓴 김선영 박사는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종양내과란 암환자가 찾아오는 곳이라 병원에서도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은이가 종양내과를 '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돕는 곳'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부제가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다'이다. 지은이가 중3 때 아버지가 담낭암에 걸려 1년 동안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잃은 딸은 의사가 되었고, 환자의 죽음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은 아버지의 죽음을 복기하면서 지은이가 담당하고 있는 환자들의 사연 및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지은이는 아버지의 죽음부터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음에도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조차 이해하지 ..

읽고본느낌 2024.06.29

절주의 기준

지난 달에 과음을 하고 실수를 한 뒤에 금주를 결심했는데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내 의지를 믿고 절주를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1년 반 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금주를 실행했었다. 술을 안 마시면 심신의 모든 면에서 이득이 많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 노년이면 안 그래도 정든 것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데 술까지 억지로 빼낸다는 것은 - 너무 야박한 일이라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절주의 기준은 집에 들어왔을 때 술 마신 걸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름 정해두고 있다. 주량으로는 대략 소주 한 병 정도다. 그 이상이 되면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 어제 모임에서도 그 정도에서 끝냈고 적당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

참살이의꿈 2024.06.28

서울의 봄

작년에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였으나 늦게야 보게 되었다. 10.26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가 싶었으나 전두환이 주동한 하나회의 정치군인들에 의해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나고 세상은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 영화는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불법 쿠데타를 막으려 했던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악과 선의 대립 구도로 짜면서 그날 밤의 9시간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인 만큼 극적 효과를 위해 과장되게 묘사한 장면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장태완과 전두환이 광화문에서 대치한 장면이 그랬다. 장태완은 그때 이미 부하에 의해 체포된 상태였다고 알고 있다. 진압군에 앞장을 섰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등이 힘을 못 쓴 이유는 부하들 ..

읽고본느낌 2024.06.26

유신

박정희의 유신시대는 나의 20대와 겹친다. 유신시대 7년 동안 대학생과 사병의 신분이었으니 아름다운 청춘을 암흑의 시대에서 보낸 셈이다. 보통 '10월유신'이라 부르는데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를 말한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1972년 10월 17일부터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기간이다. 이 동안 아홉 번의 긴급조치와 계엄령, 위수령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말살했다. 사학자인 한홍구 선생이 쓴 은 이 비극의 시대에 대한 기록으로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여서인지 되풀이되는 역사에 대한 비감이 서려 있다. 사건들마다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나서 내 20대를 돌아보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돌아보니 197..

읽고본느낌 2024.06.25

장마가 시작된 경안천을 걷다

초여름의 불더위를 몰아내는 장마가 찾아왔다. 한때는 기온이 35℃까지 치솟더니 비가 내리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다. 땡볕에서는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은 구름이 햇볕을 가려줘서 경안천 걷기에 나섰다. 배낭 안에는 식수, 참외, 떡을 챙겼다. 반바지를 입으니 상쾌했다. 내린 비로 경안천은 황토색이 되었다. 물은 하수 냄새가 섞인 물비린내가 진했다. 길은 군데군데 질척거렸다. 천 건너편에서는 종합운동장 공사가 한창이다.  걸으면서 이것저것 밀려오는 상념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여러 얼굴들이 명멸한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여워지기도 하고 어여뻐지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시공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를 꼬옥 껴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세 시간여를 걸었다. 맨발걷기에 빠진 아내는 ..

사진속일상 2024.06.24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울 때는협궤열차를 생각한다해안선을 따라 삐걱이는 안개 속차창을 때리는 찬 눈발을눈발에 묻어오는 갯비린내를 답답할 때는늙은 역장을 생각한다발차신호의 기를 흔드는깊은 주름살얼굴에 고인 고단한 삶을 산다른 일이 때로 고되고떳떳하게 산다는 일이더욱 힘겨울 때 괴로울 때는여인네들을 생각한다아직도 살아서 뛰는광주리 속의 물고기 같은장바닥 여인네들의 새벽 싸움질을 밀려가는 썰물도 잡고 안 놓을그 억센 여인네들의 손아귀를외로울 때는 -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움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비슷한 조건인데도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있고, 덤덤한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고립되면 대체로 외로움을 느낀다. 사회 안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없어지거나 축소되어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은 관계의 결핍에서 온다고 봐도 ..

시읽는기쁨 2024.06.23

사기[19-3]

"우경은 어떤 인물이오?"이때 후영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사람이란 본래 알기가 힘들지니 남을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우경이란 인물은 짚신을 신고 챙이 긴 삿갓을 쓴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조나라 왕을 한 번 만나 백옥 한 쌍과 황금 100일을 받았고, 두 번 만나 상경에 임명되었으며, 세 번 만나 재상의 인수를 받고 만호후에 봉해졌습니다. 그때는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위제가 궁지에 빠져서 곤란해져 우경에게 매달리자, 우경은 높은 작위와 봉록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재상의 인수를 풀어놓고 만호후의 봉록도 버리고 몰래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남의 곤궁함을 긴급하게 여겨 공자를 의지하러 온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어떤 인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이란 본래 알..

삶의나침반 2024.06.22

한 장의 사진(35)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철없었던 유소년 시절을 제외하고 전체를  조망해 볼 때 의심 없이 딱 짚히는 한 시기가 있다. 바로 1990년대 초반으로 내 나이 40대에 들어선 때였다. 그때는 가정이나 직장, 개인적인 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제일 빛나는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내 집을 장만하는 게 일차 목표가 되는데 마침 그때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나도 그럴듯한 '마이 하우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한강 이남의 인기 지역이었다. 그전까지 10평대에 살다가 30평대로 옮기니 마치 대궐 같았다. 아이 둘은 초등학생이었으니 귀엽기만 할 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힘든 결혼 초기를 보낸 아내도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당시 60대였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

길위의단상 2024.06.21

영화 아홉 편

최근 열흘 사이에 영화 아홉 편을 봤다. 극장에서 신작을 본 건 아니고 집에서 주로 넷플릭스를 통해 본 것이었다. 영화는 한 달에 한두 편을 보는 것이 고작인데 이처럼 단기간에 몰아 본 것은 드문 일이었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독서를 하기는 힘드나 영화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떠나고 싶을 때 영화에 몰입하면 번뇌에 시달리는 나를 잊게 된다. 이번 영화 아홉 편은 그런 효용성이 컸다. 1. 화양연화(花樣年華)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처음 봤을 때가 너무 오래 되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생활 공간이나 인물의 성격에서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니 동병상련을 가진 두 남녀의 사랑을 절제있게 잘 그려낸 수작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과 성격에 많이 공감했다. 영화의..

읽고본느낌 2024.06.19

영종도 드라이브

콧바람을 쐬기 위해 영종도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울적한 데다 아파트 외벽 도장 공사 중이라 창문을 닫아놓고 있어야 하니 답답함이 더해서였다. 집에 있을 때는 움직이기가 귀찮지만 밖에 나서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늘 그렇다. 눈부시게 밝은 초여름 날의 드라이브였다. 영종도에 갈 때는 인천대교를 건너는데 이번에는 예전에 다녔던 영종대교를 이용했다. 2층으로 된 이 다리도 개통한 지 벌써 24년이 되었다.   어디에선가 소개하는 걸 봤던 예단포둘레길이 떠올라 먼저 예단포선착장으로 갔다. 영종도 북쪽에 있는 예단포는 강화도와 마주보고 있다. 언젠가는 강화도와 예단포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질 것 같다. 예단포둘레길은 바다에 연한 산길을 따라 걷는 짧으면서 아기자기한 길이다. 바다 조망이 아주 멋지다.   ..

사진속일상 2024.06.18

너의 목소리가 들려

지금은 뜸해졌지만 한때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벌이는 대폭주는 규모가 엄청났고 시민들에게 주는 피해도 컸다. 저게 무슨 짓거리냐,가 대부분의 반응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경찰력으로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걸 원망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들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는 폭주를 감행하는 십대들의 분노와 절망을 그들의 시선에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가출 청소년의 어두운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이런 삶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어두운 뒷골목이나 지하의 사연을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제이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처지의 아이들과 지..

읽고본느낌 2024.06.17

산수 시간 / 유금옥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확성기를 단트럭이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밖으로살금살금 달아납니다.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드는파아란 밭둑길을 뛰어갑니다.복슬복슬한 흰 구름도 따라갑니다.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목쉰 트럭이기웃기웃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안으로 살금살금강아지를 안고 들어옵니다. 친구들이 3, 1은 3. 3, 2, 63, 3, 9. 구구단을 외우고 있습니다.목소리를 점점 높여 줍니다. - 산수 시간 / 유금옥 어제 관악산에서 초등 동기들 모임이 있었다. 나는 나가지 않았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영감들 사진이 단톡방에 무더기로 올라왔다. 내 눈은 스르르 감기면서 타임머신을 탄 듯 60년 전으로 돌아간다. 아마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었을 것이다.  십 년이면 강..

시읽는기쁨 2024.06.16

행복이란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다.터키의 한 시인이 화가 친구에게 행복에 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화가 친구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든 한 가족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바로 이 그림이다.  얼마나 가난한지 천정에서는 비가 새고 있고, 침대의 한쪽 다리도 부러져서 벽돌로 받쳐 놓았다. 그런데도 부부와 여섯 자녀들은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침대 위에는 개와 고양이도 끼여 한 치의 틈도 없이 옹기종기 어울려 같이 자고 있다.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행복은 문제가 없는 것에서가 아닌, 문제가 있는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나쁘더라도 내가 가진 것, 내가 처한 곳에서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세요. 당신이 통제할 수 없..

참살이의꿈 2024.06.15

강동그린웨이를 걷다

용두회에서 강동그린웨이를 걸었다. 일자산허브천문공원에서 일자산 능선을 따라 오륜동까지 걸었는데 서울둘레길 7코스와 겹치는 길이었다. 산을 내려와 다시 성내동까지 걸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래봤자 총 걸은 거리는 5km 남짓 되었다. 초여름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다.  산길에 핀 개망초꽃 너머로 하남 시내 아파트 숲이 빽빽했다.   일자산자연공원 안에 있는 논에서는 공원 인부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못줄을 대고 심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바쁜 모내기철이면 조금이라도 일손을 덜려고 논둑에서 못줄대를 잡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쉬워 보였지만 농사 요령이 있을 턱이 없는 소년에게는 그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성내시장에서 보쌈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둔촌동에 있는 당구장에서 오후 시간..

사진속일상 2024.06.14

사기[19-2]

범저가 말했다."네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수고가 대답했다."제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속죄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범저가 말했다."네 죄목은 세 가지이다. 너는 예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여겨 나를 위제에게 모함했으니 첫 번째 죄이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기 위하여 변소에 두었을 때 말리지 않았으니 두 번째 죄이다. 위제의 빈객들이 취하여 번갈아 가며 내게 오줌을 누었으나 그대는 모른 척했으니 세 번째 죄이다. 그러나 오늘 그대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두꺼운 명주 솜옷을 주면서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를 풀어주겠다."이렇게 말을 끝냈다. 범저는 궁궐로 들어가 소왕에게 보고하고 수고를 숙소로 돌려보냈다.수고가 범저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가자, 범저는 크게 잔치를..

삶의나침반 2024.06.12

오전과 오후

오전 야탑 모임에 나가기 위해 아침을 먹고 나서면 대개 30분 정도 이르다. 집에서 뭉기적거리기도 뭣해서 대개 일찍 나와 몇 정거장 앞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간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비치는 천변 길을 나는 사랑한다. 오늘은 낯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천변으로 내려가는 길을 잃었다. 골든 리트리버를 데리고 산책 나온 아주머니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오늘따라 골든 리트리버가 쓰다듬어 주고 싶은 정도로 이뻐 보였다. 개는 좋아하지 않지만 골든 리트리버는 예외다. 무심하면서 달관한 듯한 그 표정을 사랑한다.   오후 당구 네 판, 바둑 세 판을 두고 나니 기력이 다한 듯 기진했다. 더구나 공은 빗맞고 돌은 엉뚱한 데 놓여 전적이 좋지 않았다. 해가 무겁게 서쪽 마을로 가라앉고 있었..

사진속일상 2024.06.11

델마와 루이스

1991년에 나왔으니 어느덧 30년이 넘은 영화다. 감독은 리드리 스콧이고 델마 역은 지나 데이비스, 루이스 역은 수잔 서랜드가 맡았다. 브래드 피트가 제이드 역으로 짧게 나오는데 배우로 데뷔한 초창기의 브래드 피트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역이 찌질한데다 연기가 어설퍼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를 이제야 찾아봤다. 역시 라스트의 충격이 큰 영화였다. 권위적인 남편을 둔 델마와 식당 웨이트리스인 루이스는 일상을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난다. 해방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강간을 당하는 델마를 구해주려다 루이스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둘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멕시코로 넘어가려던 계획도 틀어지고 둘은 그랜드 캐니언에서 최후의 선택을 한다..

읽고본느낌 2024.06.09

삼한사온

전에 직장 동료였던 H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년 가량 연락이 끊어진 채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걱정되기도 했다. 누구든지 통화를 하게 되면 맨 처음 묻는 말이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H는 대뜸 말했다."삼한사온으로 살고 있지요."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H의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시원찮았다가 괜찮았다를 반복하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온갖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주기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삶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10여년 전부터 겪었던 증상과 비슷했다. 불현듯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이삼 주 정도 지속되면서 괴롭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니 일상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러다가 슬며..

길위의단상 2024.06.08

땅에 쓰는 시

우리나라 제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 선생이 직접 나오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는 선생이 만든 정원과 자택을 중심으로 사계절에 걸친 풍경을 통해 선생의 조경 철학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선생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영화에 나오는 장소를 통해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알게 되었다. '땅에 쓰는 시'에서 제일 긴 시간 동안 소개되는 장소가 선유도공원이다. 아마 선생의 대표작인 것 같다. 선유도공원은 근처에 위치한 직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앞마당처럼 드나들었던 곳이다. 옛날 정수 시설을 그대로 활용해서 만든 공원이라 특이하다 여겼는데 정영선 선생의 작품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선유도공원만 봐도 선생의 조경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를 감잡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

읽고본느낌 2024.06.07

침이 고인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침이 고인다'를 비롯해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전반부에 실린 소설은 밀도가 높고 뛰어나지만, 후반부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작가는 주로 도시 변방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것 같다. 잘 보이지 않는, 외면하고픈 아픈 현실을 위트 넘치는 문제로 보여준다. 일상은 고달프고 비루하지만 주인공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밟혀도 꿋꿋이 견뎌내고 일어서는 길 위의 잡초처럼 살아내는 숫한 청춘들이 있다. '침이 고인다'에서는 학원 강사로 일하는 그녀가 사는 원룸에 더 가난한 후배가 찾아온다. 그날 밤 그녀는 후배의 얘기를 들으며 같이 지내기로 결심한다. 후배가 그녀에게 들려준 얘기는 어떻게 부모에게 버림받았는가에 대한 아픈 추억이..

읽고본느낌 2024.06.06

한강을 걷다(자양역~강변역)

요사이 날씨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더 이상 바라지 못할 정도로 맑고 밝은 하늘과 땅이다. 대기도 깨끗하며 상큼하기 그지없다. 거의 일주일 정도 기적처럼 이어지는 날씨다. 서울에서 1차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랜만에 한 시간여 한강변을 걸었다. 서울을 떠난 뒤로는 한강을 걸을 일이 없어졌다. 자박자박 내딛는 걸음마다 아스라하면서 쓸쓸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강물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쉬기도 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한강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두 주 전에 뚝섬한강공원에서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다. 주 행사는 끝났지만 정원 전시는 올 가을까지 계속된다. 작가가 만든 정원과 학생들이 출품한 정원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라는 명칭에 비해 내..

사진속일상 2024.06.05

초여름의 짧은 산책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나고 따끔거리면서 충혈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눈곱이 잔뜩 껴서 눈을 뜨기도 힘들다. 병원에서는 눈물관막힘 증상이라고 한다. 눈물샘에서 나온 눈물은 눈을 적신 후 눈물관과 눈물주머니를 통해 코 속으로 배출되는데 그 경로가 막히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들어 심해졌다.  이 증상이 왜 바람과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밖에 나가는 게 조심스럽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외출을 피한다. 의사가 고글 안경을 쓰는 게 좋다고 해서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쓰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늙으니까 이곳저곳에서 탈이 생긴다. 병원에 가면 자주 듣는 말인 '노화 현상"이다. 생명에는 직접 관계되지 않지만 일상은 불편하다. 요사이 날씨..

사진속일상 2024.06.03

소풍

노년의 상실과 아픔을 리얼하게 그린 영화다. 생로병사는 인간 존재의 숙명이지만 말년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회피하려 한다. 나에게도 닥칠 미래임을 인지하나 애써 외면한다. 직시한다고 뭐 뾰족한 수도 없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감내하며 살 뿐이다. 영화 '소풍(逍風)'은 이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은심(나문희)과 금순(김영옥)은 고향 친구면서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둘 다 지병에다 자식들이 골치를 썩힌다는 고민을 갖고 있다. 훌훌 털고 금순이 사는 고향인 남해에 내려온 은심은 역시 어릴 적 친구였던 태호(박근형)를 만나 잠시나마 추억에 젖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고향은 옛 고향이 아니었다. 다녔던 학교는 폐교되었고, 동네는 리조트가 들어선다고 시끄럽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읽고본느낌 2024.06.02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오래오래 우리나라는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시읽는기쁨 2024.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