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과음을 하고 실수를 한 뒤에 금주를 결심했는데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내 의지를 믿고 절주를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1년 반 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금주를 실행했었다. 술을 안 마시면 심신의 모든 면에서 이득이 많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 노년이면 안 그래도 정든 것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데 술까지 억지로 빼낸다는 것은 - 너무 야박한 일이라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절주의 기준은 집에 들어왔을 때 술 마신 걸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름 정해두고 있다. 주량으로는 대략 소주 한 병 정도다. 그 이상이 되면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 어제 모임에서도 그 정도에서 끝냈고 적당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고양된 기분을 즐기기 위해 탄천을 산책했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은 따스했고, 오전의 울적했던 감정도 사라졌다. 버스 차창으로 나른하게 다가오는 풍경들도 아름다웠다. 술이 없으면 안 되겠다고, 알코올의 힘은 위대하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작은 행복에 잠겼다.
아내가 잔소리처럼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노인이 돼 가지고 제발 밖에서 술 취한 추태를 보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버스나 전철을 탈 때 술냄새 풍기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제일 고역이라고 했다. 이상도 하지. 젊은이가 취한 것은 귀엽게 봐 줄만 한데, 노인이 취한 모습은 꼴불견이 되니 말이다. 술뿐이겠는가. 다른 비호감도도 나이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자꾸 뒤로 숨으려 하는지 모른다.
이젠 젊었을 때처럼 호기롭게 술을 마시지 못한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겠지만 노심(老心)이 되면 매사에 위축되기 때문이다. 늙은 주제에 주책까지 부려서는 안 되겠다는 압박이 내심 생기는 것이다. 50대 때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이 되도록 자주 술을 퍼마셨다. 잠도 거의 못 잔 채 출근해서는 어젯밤에는 알코올로 장 소독을 시원하게 했다고 큰소리쳤다. 다 옛날이야기다.
한 친구가 말하길, 어느 모임이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병'이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일병'으로 바뀌었다고 씁쓰레하게 웃었다. 여기서 '이병' '일병'은 각자가 마시는 소주병 숫자다. "야, 일흔이 넘은 지가 언젠데 그 정도면 건강하고 축복받은 거야." 더구나 이병에서 일병으로 진급했으면서 말이다. 건강 문제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주변을 살피면 우리가 가벼이 마시는 술 한 잔에도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난폭 음주라니. 내가 조심스럽게 절주해야 마땅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나이 일흔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 칭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성인(聖人),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노곤하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공자가 72세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의 내 나이라는 사실과 함께. 잠시 부끄러웠다가, 아니, 비교할 데를 비교해야지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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