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35)

샌. 2024. 6. 21. 11:12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철없었던 유소년 시절을 제외하고 전체를  조망해 볼 때 의심 없이 딱 짚히는 한 시기가 있다. 바로 1990년대 초반으로 내 나이 40대에 들어선 때였다. 그때는 가정이나 직장, 개인적인 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제일 빛나는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내 집을 장만하는 게 일차 목표가 되는데 마침 그때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나도 그럴듯한 '마이 하우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한강 이남의 인기 지역이었다. 그전까지 10평대에 살다가 30평대로 옮기니 마치 대궐 같았다. 아이 둘은 초등학생이었으니 귀엽기만 할 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힘든 결혼 초기를 보낸 아내도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당시 60대였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계셨다. 가정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가 그때였다.

 

다니던 직장은 S실업고였다. 인문계 과목 교사에게 실업계 학교는 입시 지도가 없으니 부담이 확 줄어드는 곳이다. 담임도 맡지 않고 보직도 없으니 맡은 수업만 하면 됐다. 수업 시간도 적었다. 특히 아이들이 현장 실습을 나가는 2학기가 되면 더 줄어들었다. 제일 적게 할 때는 주당 9시간이었는데, 그러니 수업이 전혀 없는 요일도 있었다. 이 정도면 대학 교수도 부러워할 직장이었다.

 

교직 생활 중 가장 재미있게 보낸 때였다. 외적인 압박이 없으니 동료들과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는 바둑실, 탁구실이 있어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자유롭게 놀았다. 그뒤로 학교 내에서 교사들의 취미 생활에 대해 통제를 했지만 그때만 해도 수업 시간만 지키면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방임해 주었다. 간혹 바둑을 두다가 교실에 들어가는 걸 잊어버려 반장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허허, 하며 다들 웃어넘겼다.

 

틈만 나면 동료들과 등산이나 나들이를 했다. 과학과 셋이서 칠선계곡을 따라 지리산에 올라갔던 기억이 새롭다. 셋은 어울리면 고스톱을 쳤다. 지리산 천왕을 가리자며 산장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소등하지 않는다고 주의를 받기도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길바닥에 자리를 깔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천문반 아이들을 데리고 소백산으로, 영종도로 적도의가 달린 무거운 망원경을 메고 별을 보러 다녔다. 인문계 학교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낭만의 교직 생활을 만끽하던 때였다.

 

1994년에 김영삼 정부에서는 과학 교사들에게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응모를 했는데 운좋게 전국 30명의 과학 교사 중 하나로 뽑혔다. 그래서 한 달간 독일로 공짜 연수를 나갔다. 독일을 일주하며 대학, 박물관, 과학관, 연구소 등지를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독일 교수의 강의를 듣고 견학을 하는 것이니 일종의 신사유람단이었다. 엄청난 혜택을 받은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이 또한 S실업고에 있을 때였다.

 

 

이 사진은 독일 연수 중 친구와 파리에 갔을 때 찍은 것이다. 토, 일은 휴일이라 우리는 끼리끼리 어울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주변국을 돌아다녔다. 가까이 있는 파리가 빠질 수 없었다. 그때 유럽을 보면서 문화 쇼크를 많이 받았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으니 단편적인 물리 지식의 습득과는 비교되지 않을 소득이었다.

 

그때는 독일이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옛 동독 지역에 들어갔을 때는 분위기가 생경했던 기억이 난다. 왜 사회주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이미 사라진 빈 껍데기를 보면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 뮌헨에 갔을 때는 마침 옥토버 페스트 기간이라 축제 현장에 직접 함께 했다. 넓은 홀에서 연신 건배를 외치며 독일 맥주를 호기롭게 마셨다. 독일을 다니면서 각 지역 특색을 지닌 맥주도 많이 맛봤다. 그중에서도 흑맥주의 구수한 맛은 일품이었다. 뒤셀도르프에 있을 때는 "알트비어"하면서 주문했다.

 

40대 초반의 5년 정도가 나의 화양연화였다. 가정은 편안했고, 직장 생활은 즐거웠으며, 건강한 가운데 여러 행운이 함께 했던 꽃처럼 반짝이던 시기였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절이 남긴 사진을 보면서 아름다웠던 한 때를 추억한다. 다시 돌아가보고 싶은 시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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