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삼한사온

샌. 2024. 6. 8. 10:49

전에 직장 동료였던 H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년 가량 연락이 끊어진 채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걱정되기도 했다. 누구든지 통화를 하게 되면 맨 처음 묻는 말이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H는 대뜸 말했다.

"삼한사온으로 살고 있지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H의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시원찮았다가 괜찮았다를 반복하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온갖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주기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삶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10여년 전부터 겪었던 증상과 비슷했다. 불현듯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이삼 주 정도 지속되면서 괴롭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니 일상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러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일 년에 두세 차례는 이런 손님이 찾아왔다. 결국 이석증으로 판명되었고 7년 넘게 시달리다가 2년 전부터는 다행히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H에게 내 경험을 전해주며 어떻게 대응할지를 얘기해 주었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이런저런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다. 어지럼증 정도는 애교 수준에 속할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통증이 이곳저곳에서 생긴다. 그러려니,하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H가 말한 '삼한사온'이 노년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사소한 것이 심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얼마 전에 모 대학 동기는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욕조에 가슴이 부딪히며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찔렀다. 지금 병원에 입원해서 폐에 고인 물을 빼내고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거실 바닥에 깔아놓은 양탄자에 걸려 넘어져 몇 달째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노년이 되면 조심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주의한다고 모든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H와 통화 뒤 단톡방에서도 대화를 이어갔다. 누구나 속을 터놓다 보면 쉽게 사는 사람들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지금은 '삼한사온'이지만 더 세월이 흐르면 '사한삼온'이 되고, '오한이온'도 될 것이다. C의 말대로 "그런 갑다"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않은가.

 

- A: 이 샘, 어제 통화에서 '삼한사온'이라는 말이 와 닿았소. 우리 노년의 삶이 정말 그러한 듯... 나나 아내도 어지럼증으로 오래 힘들었지요. 화장실에서 쓰러져 실려가기도 하고 - 다행히 이석증으로 밝혀졌지만 - 그 뒤로 수시로 재발해서, ㅠ~ 살면서 우리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되겠소. 부디 마음 편하게 갖고 삽시다. 인생, 케세라세라인 것을!

- B: 아, 선배님과 사모님도 힘든 시절을 겪여내셨군요.

- C: 인생을 살다 보니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 좋은 일이 돌아올 것입니다. 저도 건강이 별로지만 실망만 하고 살 수 없잖아요. 그저 그런 갑다고 살고 있습니다. 힘내시면 반드시 좋은 일이 올 것입니다. 다들 힘내세요.

- A: 맞아요. "그런 갑다"하면 또 그럭저럭 살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감사할 마음도 일어나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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