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26

사기[21-2]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염파가 이 말을 듣고는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빈객으로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미천한 저는 상경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 사기(史記) 21-2, 염파인상여열전..

삶의나침반 2024.07.31

사랑의 찬가 / 에디뜨 피아프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흐르고내 몸이 당신의 손 아래서 떨고 있는 한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내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만약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고 하겠어요만약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하늘의 달을 따러, 보물을 훔치러 가겠어요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조국도 버리고, 친구 버리겠어요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비웃는다 해도나는 무엇이건 해 내겠어요만약 어느 날 갑자기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만약 당신이 죽어서 멀리 가 버린다 해도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

시읽는기쁨 2024.07.30

물무궁화

동네 골목길 빈터에 몇 송이가 자라고 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부용인가 싶었는데 네이버 렌즈로 검색해 보니 물무궁화라 부르는 꽃이다. 원산지는 미국 남동부 지역이고 아욱과 무궁화속이다. 무궁화, 부용 등과 사촌 쯤 된다. 습기 많은 땅을 좋아한다고 앞에 '물'자를 붙인 듯하다. 이 꽃은 단풍잎촉규화로도 불린다. 촉규화(蜀葵花)를 직역하면 '촉나라 해바라기꽃'이다. 촉규화는 접시꽃으로 알려져 있다. 다들 같은 아욱과이니 생김새가 비슷하다. 물무궁화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화려한 여름꽃이다. 진한 붉은색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닮았다. 물무궁화는 지금 같은 장마철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반가울 것이다. 곁을 지날 때마다 이제는 네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겠다.

꽃들의향기 2024.07.29

힐빌리의 노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가 J.D. 밴슨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984년 생인 밴슨은 정계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정치 신인이다. 그는 2016년에 자전적 소설인 를 썼고, 2020년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유명해졌다. 이번에 밴스가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보게 된 영화다. 'hillbilly'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두멧사람,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특히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남부의 산악 지대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밴스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영화에도 이들의 삶이 궁핍하고 거칠게 그려져 있다. 러스트 벨트(rust belt)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더욱 열악한 상태에 빠진 것 같다. 잘 드러나지 않는 미국의 어두운..

읽고본느낌 2024.07.28

도로변 자귀나무

자주 이용하는 버스정류장 옆에 자귀나무 한 그루가 있다. 차가 쌩쌩 달리는 4차선 도로변에서 소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다. 여름이 되니 분홍색 꽃을 피워 자꾸 올려다보게 된다. 지나가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꽃잎은 쉼없이 흔들린다. 자귀나무 꽃은 비단이 연상될 고운 색깔을 띄고 있다. 미풍에도 한들거릴 만큼 가늘고 부드럽다. 자귀나무는 꽃만 아니라 가지런한 잎도 예쁘다.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이 고급 정원수에 어울리건만 험한 도로변이 있을 곳은 아닌 것 같다. 분별을 일삼는 인간의 생각이겠지만. 원뜻이 뭔지는 모르지만 자귀나무의 '자귀'를 나는 '自貴'로 읽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긴다" - 꽃 이름에서도 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꽃들의향기 2024.07.27

포기할 수 없는 아픔에 대하여

"병원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의학이라는 영역 너머의 것이 있다. 치료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절한 제도가 없어서 죽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10년간 허무하게 떠나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나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지은이인 내과 전문의 김현지 의사는 의료 현장에 있으면서 의료 시스템 뒤에 숨겨진 정책의 부조리, 제도의 부재, 가난과 건강의 불평등에 주목했다. 그가 '정책하는' 의사로 나선 배경이다.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올바른 의료 제도를 만드는 일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입법 활동을 돕기도 했다. 그의 목표는 '만인에게 성취 가능한 최선의 건강'이라고 한다. 는 지은이가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의 죽음과 삶을 통해 인지하게 된 우리 사..

읽고본느낌 2024.07.26

봉우리 / 김민기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작은 봉우리 얘길 해줄까 봉우리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나한텐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오르고 있었던 거야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얼마 남지 않았는데 잊어버려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봉우리에 올라서서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아무것도 아냐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그저 고갯마루였을 뿐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거기 부러진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나는 봤지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시읽는기쁨 2024.07.24

2024 세미원 연꽃

올해 세미원 연꽃은 끝물에 가서인지 시원찮았다. 넓은 연밭에서 제대로 형태를 갖춘 연꽃을 찾기 힘들었다. 꽃이 그래선지 세미원 관리도 엉성해 보였다. 아내와 같이 가서 세미원에서 두물경까지 왕복 걸음을 했다.  수련, 빅토리아연, 빗물 담은 연잎.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장마철이어선지 팔당호 주변은 쓰레기로 지저분했다.   두물머리 느티나무 앞 벤치에 귀여운 조형물이 생겼다. 양평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봄처럼 따스한 양평'이라는 뜻의 '양춘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손에 핫도그를 들고 있다. 옆에 앉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포근한 모델이다.

꽃들의향기 2024.07.23

사기[21-1]

"지금 신이 진나라에 이르니 왕께서는 신을 별궁에서 만나고 예절을 하찮게 여기며 아주 거만하십니다. 그리고 화씨벽을 받으시고는 비빈들에게 차례로 건네주면서 신을 희롱했습니다. 신은 왕께서 화씨벽을 받은 대가로 조나라에 성을 내줄 마음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화씨벽을 다시 돌려받은 것입니다. 왕께서 기필코 만일 신을 협박하려고 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이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깨질 것입니다." - 사기(史記) 21-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전국시대에 조나라는 강국인 진나라 옆에 위치해서 잦은 침략과 협박을 받았다. 염파와 인상여는 조나라 말기에 장군과 재상으로 있으면서 조나라를 지켜낸 인물이다. 당시 조나라는 천하의 보물이라는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있었다. 진나라가 가만히 두고 볼..

삶의나침반 2024.07.22

바늘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읽은 천운영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바늘'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20여 년 전에 쓰인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은 특이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여성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인물이어서 충격을 받는다. 소설에 나오는 그들은 못 생긴데다 폭력적인 야수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여성은 예쁘고 우아하다는 기존의 사고 틀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가부장제하에서 구축된 모성이나 여성성의 허구를 작가는 깨부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전부 육식을 탐한다. 이런 동물적인 피의 욕구는 외부세계에 대한그들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행복고물상'에 나오는 여자는 남편을 상습적으로 매질한다. "아내는 야생의 초원을 가졌다..

읽고본느낌 2024.07.21

나흘 동안 어머니와 지내다

고향에 내려가서 나흘 동안 어머니와 지내다가 왔다. 장마 기간이라 내내 비가 오는 통에 집에만 있었다. 바깥 외출은 옆집 친구를 찾아가서 잠깐 근황을 나눈 게 전부였다. 비는 사납게만 내리지 않으면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존재다. 농민도 비 핑계를 대면서 고단한 몸을 쉴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고향을 오가는 길이 운치 있는 드라이브가 된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줄 밭작물을 다듬고 나는 옆에서 거드는 흉내를 낸다.  어머니의 부지런함을 어찌  따라갈 수 있으랴. 잠시라도 비가 그치면 금세 보이지 않는데 텃밭에 나가면 찾을 수 있다. 장수 노인들의 공통점은 가만히 있지 않고 쉼 없이 몸을 움직인다.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다.  점심에는 어머니와 둘이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반주를 곁들였다. 어머니는 ..

사진속일상 2024.07.20

성난 물소 놓아주기

당신이 절에 살든, 도시에 살든, 혹은 가로수가 늘어 있는 조용한 거리에 살든, 다른 어디에 살든 때로 문제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삶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 "의사 선생님, 제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이 났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제게 정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병이 났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을 할 때든, 명상을 할 때든 가끔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라. 이 세상을 자기 마음에 들게 만들기 위해 다그치거나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가족과 세상과 싸울수록 부수적인 여러 가지 문제..

읽고본느낌 2024.07.16

에어쇼, 고공낙하, 퍼레이드, 불꽃놀이

내일부터 우리 고장에서 '세계 관악 컨퍼런스'가 열린다. 격년으로 개최되는 이 행사는 세계 관악(管樂人)들의 축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열린다고 한다. 이번 주말에 다채로운 개막 행사가 있었다. 1. 블랙이글스의 에어쇼예행연습을 하느라 일주일 전부터 하늘이 시끄러웠다. 예고된 시간에 집 밖에 나가서 봤는데 좀 더 발품을 팔아서 비행기가 다니는 라인 아래에 갔더라면 더 멋진 구경거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웠다. 공연 시간은 30분 정도 되었다.   2. 공수특전단의 고공낙하   3. 군악대의 거리 퍼레이드   4. 불꽃놀이"펑 펑" 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얼른 카메라를 꺼내 창에 기대어 찍었다. 시청 광장에서 K-Music 공연이 끝나고 쏘아올리는 불꽃이었다.  주말 이틀 동안 '세계 관악 컨퍼런스'의 몇 야외..

사진속일상 2024.07.15

이재명의 먹사니즘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다." 지난 10일에 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재명 후보가 한 말이다. 먹사니즘/먹고사니즘은 '먹고살다'와 '-ism'의 합성어로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태도다. 또는 생계유지에 급급해 다른 것들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를 꺼리는 태도를 의미하기도 해서 부정적인 의미가 큰 용어다. 차기 대통령이 유력시 되는 이재명 후보의 발언은 국민의 주목을 받는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강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설마 이 후보의 본심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갖는다. 첫째, 먹사니즘이 과연 이 시대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후보는 ..

길위의단상 2024.07.14

소리를 괴롭히지 말라

위층에는 10년 넘게 올빼미가 산다. 초기보다는 활동량이나 빈도가 줄었지만 한밤중에 들리는 - 밤 11시에서 2시 사이 - 생활 소음은 잠을 못 이루게 하여 괴롭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미리 곯아떨어지는 게 제일이다. 층간소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하느냐는 오랫동안 내 삶의 화두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를 괴롭히고 짜증나게 만드는 소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쓴 어느 스님의 글을 보았다. 스님은 명상을 방해하는 소음을 말하고 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명상하면서 나는 나에게 묻곤 한다. "어째서 소음은 나를 어지럽게 만들까?" 밖에서 나는 새소리든 누군가가 기침하든, 넒은 홀 문이 쾅 하고 닫히든 어째서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눈꺼풀을 닫아버..

참살이의꿈 2024.07.13

내 심장을 향해 쏴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1976년에 미국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유타주에서 개리 길모어가 두 사람을 권총으로 살해하고는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항소를 포기하고 국가가 자신을 빨리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사형제 존폐가 이슈가 된 당시 상황에서 개리 길모어의 돌발 행동은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결국 개리 길모어는 다음 해에 처형되었다. 는 개리 길모어의 동생인 마이클 길모어가 자신의 형이 왜 그렇게 잔인한 범죄자가 되었는지를 밝히는 책이다. 악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가계의 역사부터 그들의 신앙이었던 모르몬교의 '피의 속죄' 같은 폭력성까지 파헤쳐 올라간다. 더 나아가면 원주민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자행한 미국이 뿌린 피의 역사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미국은 저주받은 땅인지도 ..

읽고본느낌 2024.07.12

장마철의 깜짝 선물

어젯밤에는 내내 빗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갠 하늘이 반겼다. 이런 날 밖에 나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햇볕을 가득 받을 짧은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사람의 기분은 기상 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다. 장마 때는 날씨 따라 마음도 눅눅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니 하고 지내지만 장마가 길어질수록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가끔은 오늘처럼 깜짝 선물을 주니 이런 변덕이라면 환영할 만하다. 너무 햇빛이 쨍 나서인지 경안천에 나온 사람은 드물었다.   오늘 걷기의 주제는 하늘과 구름이다. 이런 하늘이라면 아무리 쳐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푸른 화판에 흰 물감으로 그려지는 풍경에 넋이 나가다.   동쪽 하늘에는 채운(彩雲)도 나타났다.  7월 16일부터 '세..

사진속일상 2024.07.10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두 눈을 깊게 뜨고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첼로를 켜며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부터 떠오르는 아침이면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달력 속에서 뚝, 뚝,꽃잎 떨어지는 날이면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나는 너에게로 가까..

시읽는기쁨 2024.07.09

사기[20]

"신은 모욕스러운 비방으로 선왕의 명성을 떨어뜨릴까 봐 가장 두렵습니다. 이미 연나라를 버리고 조나라로 가는 큰 죄를 지었는데, 또 연나라가 지친 틈을 타 조나라를 위하여 연나라를 쳐서 연나라에게 앞서 저지른 죄를 요행으로 면해보려는 것은 도의상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신은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다만 왕을 모시는 신하들이 주위 사람들의 말을 가까이하여 멀리 내쳐진 신의 행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할까 염려되어 감히 글을 올려 말씀드립니다. 부디 군왕께서 신의 뜻을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삶의나침반 2024.07.08

원추리

밤골에 살 때 집 주변에 원추리를 심었다. 노란색의 각시원추리였다. 이웃에서 구근을 줬는데 밤골 생활 초기만 해도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괜찮았다. 원추리 꽃은 좋았는데 줄기에 진드기가 까맣게 붙어 징그러웠다. 원추리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원추리가 한자로는 훤초(萱草)다. '훤' 발음이 '원'으로, '초'가 '추'로 변한 뒤 접미사 '리'가 붙어 원추리가 되었다는 추론이 그럴듯하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원추리'라고 발음하면 어쩐지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원추리의 다른 이름이 망우초(忘憂草)다. 비슷한 글자인 '훤(諠)'이 '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옛날에는 원추리를 집안 깊숙한 내당 뜰에 심었다고 한다. 아녀자들이 이 꽃을 보며 근심과 걱정을 잊었다는 의미일지 모른..

꽃들의향기 2024.07.07

다이슨 스피어

뉴스에 우주 관련 기사가 나면 유심히 본다. 특히 외계 생명체나 문명에 대한 관심이 크다. 얼마 전에 '다이슨 스피어'가 설치됐을 가능성이 있는 별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다이슨 스피어(Dyson Sphere)는 항성의 복사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 항성을 둘러싸는 구형의 초대형 구조물을 말한다. 이런 구조물이 가능하다면 에너지 문제는 일거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에너지 수요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우주 문명 2단계에 들어서면 행성의 부존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하고 항성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현재 지구가 태양으로 받는 에너지는 전체 태양 복사에너지의 22억 분의 1에 불과하다. 문명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다이슨 스피어로 태양 복사에너지를 활용할 구상을 하지 않을 수 ..

길위의단상 2024.07.06

뜻밖의 친절

중앙 현관문을 지나 십여 걸음 앞에 작은 초등학생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나올 거고 아이는 먼저 올라갈 터였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따라갔다. 코너를 돌아가니 웬걸,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안녕하세요"라며 미소까지 짓는 것이었다. 뜻밖의 친절에 내 마음이 환해졌다. 일상에서 이런 친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친절은 전염성이 있어서 나도 따라하게 된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주면 내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다. 어떤 친절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공지영 작가의 글에서 가슴 뭉클해지는 대목을 봤다. 작가가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수녀가 된 계기를 들은 내용이다.  "전남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참살이의꿈 2024.07.05

어나더 라운드

술을 소재로 했다고 하여 찾아본 영화다. 이 영화에는 흥미로운 가설이 나온다.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부족하다. 부족한 0.05%를 채워 유지할 수 있다면 인생은 즐겁고 창의적이 된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마르틴은 무미건조한 일상이 재미가 없고 우울하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따르지 않고, 가정에서는 아내와 서먹한 관계며 아이들도 아빠를 본 척 만 척이다. 40대면 겪는 중년의 위기다. 이때 위에 나온 가설을 접하고 맞는지 실험해 본다. 혈중 알코올 0.05%는 대략 소주 한 병을 먹으면 나오는 수치가 될 거다. 마르틴은 몰래 술을 마시며 적당히 취한 상태를 유지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수업은 재미있어지고 가족과도 관계가 좋아진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서일 것이다. 이..

읽고본느낌 2024.07.04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무시할 수 없다. 내용을 알지 못해도 저자를 믿고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외국 작가야 정보가 없으니 오로지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있으나, 국내 작가는 단편적이나마 삶이 드러나 있으니 작품만 구분하여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지영 작가에 대해서는 양가감정이 있다.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투사와 같은 면이 보이지만, 어떤 때는 속된 말로 싼티가 나기도 한다. 문제를 파고 드는 치열함이 있지만 동시에 경솔하고 가벼운 면이 있는 것이다. 내 느낌이 그렇다. 는 작년에 나온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이다. 하동으로 내려가서 은거하며 살다가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떠나 다시 예수를 만난 신앙고백서라 할 수 있다. 여행사의 성지 순례 패키지 여행을 마친 뒤 예루살렘에 남아 며칠 더 ..

읽고본느낌 2024.07.03

혼자 논다 / 구상

이웃집 소녀가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무렵하루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그러길래- 유명이 무엇인데?하였더니- 몰라!란다. 그래 나는- 그거 안 좋은 거야!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 보면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잘 했어! 고마워!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혼자 논다 / 구상  '혼자 노는 소년' - 이웃에 사는 소녀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 중에 '혼자 노는 소년'에 가..

시읽는기쁨 2024.07.02

사기[19-4]

채택이 말했다."제가 듣건대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길흉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또 옛글에 '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저 네 사람이 화를 입었는데 당신은 어찌 거기에 머무르려 하십니까? 당신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의 인수를 되돌려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도록 하고 물러나 바위 밑에서 냇가의 경치를 구경하며 살게 되면 반드시 백이 같이 청렴하다는 이름을 얻고 길이 응후라 불리며 대대로 제후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허유나 계자처럼 겸양하는 마음이 있다고 칭찬을 받으며, 왕자교나 적송자 같이 오래 살 것입니다. 재앙을 입고 삶을 마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습니까? 당신은 어디에 몸을 두려 합니까? 차마 떠나지 못하고..

삶의나침반 202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