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혼자 논다 / 구상

샌. 2024. 7. 2. 10:08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길래

-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 몰라!

란다. 그래 나는

- 그거 안 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 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혼자 논다 / 구상

 

 

'혼자 노는 소년' - 이웃에 사는 소녀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 중에 '혼자 노는 소년'에 가까운 이가 있다. 늘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친구다. 어쩌다 한 사람쯤, 사납고 어수선한 세상에서 사납고 어수선하지 않게 살아가는 귀한 사람이 있다.

 

'혼자 노는 소년' 같은 노인이 아니라 실제 혼자 노는 소년을 떠올리면 슬퍼진다. 소년들은 또래들과 어울려 놀면서 큰다. 그런데 소년이 혼자 논다는 것은 뭔가 슬픈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작은 몸에 병이 있을지 모르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할 안타까운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인은 다르다.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시끌벅적한 노인들보다는 혼자 노는 노인이 훨씬 더 멋져 보인다. 이것이 노년의 장점이다. 어린아이처럼 생각이나 행동이 유치하지 않으면서 동심을 지킨다면 금상첨화다. 노인이 되어 나긋나긋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는 완고하면서 고정관념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그런 뜻에서 '혼자 노는 소년'은 노인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니겠는가. 시인이 하루 종일 유쾌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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